등수국, 환한 대낮에
오랜만에 어승생악에 올랐다.
울창한 숲, 나무 이름을 부르며 오른다.
고로쇠나무 잎이 오리발이라면
단풍나무 잎은 닭발처럼 가늘고
바위수국 잎이 나무 켜는 톱이라면
등수국 잎은 쇠줄톱이다.
그늘 속에 피어 햇빛을 간절히 바라는 박새꽃과
잎사귀 위에 피어 하늘을 나는 산딸나무 꽃
모두가 경쟁력이 있다면
우리 사는 데도 참고할 일이다.
♧ 동경(憧憬) - 이장희
여린 안개 속에 녹아든
쓸쓸하고도 낡은 저녁이
어디선지 물같이 기어와서
회색의 꿈 노래를 아뢰이며
갈대같이 가냘픈 팔로
끝없이 나의 몸을 둘러 주도다.
야릇도 하여라
나의 가슴 속 깊이도 갈앉아
가늘게 고달픈 숨을 쉬고 있던
핼푸른 옛생각은
다시금 꾸물거리며 느껴울다
아, 이러할 때
무덤같이 잠잠한 모래두던 위에
무릎을 껴안고 시름없이 앉은
이 나의 거칠은 머리칼은
나뭇잎을 스치는 바람결에
갈갈이 나부끼어라.
반원(半圓)을 커다랗게 그리는
동녘 하늘 끝에
조그만 샛별이 떠 있어
성자같이 늘어선 숲 너머로
언제 보아도 혼자일러라.
선잠에서 눈뜬 샛별은
싸늘한 나의 뺨같이 떨며
은(銀)빛진 미소(微笑)를 보내나니.
외떨어진 샛별이여,
내려봄이 어디런가.
남(藍)빛에 흔들리는 바다런가
바다이면 아마도 섬이 있고
섬이면 고운 꽃피는 수국(水國)이리라.
오, 어쩔 수 없는 머나먼 동경(憧憬)이여.
흐르는, 구름에 실려서라도
나는 가련다, 가지 않고 어이하리.
얄밉게도 지금은
수국(水國)의 꽃숲으로 돌아가 버린
그러나 그리운 옛님을 뵈올까 하여.
그러면 님이여,
혹(或)시 그대의 문(門)을 두드리거든
젊어서 시들은 나의 혼을
끝없는 안식(安息)에 멱감게 하소서.
아, 저 두던에 울리도다.
마리아의 은은한 쇠북소리에,
저녁은 갈수록 한숨지어라.
♧ 회상 - 이일영
뒤뜰에 붉은 모란 지고 백작약 꽃잎도 시들어
앞뜰에 수국이 피던 오뉴월 보리타작 하는 북새에
나는 감꽃을 줍고 있었다.
기름내 폴폴 내며 통통거리는 발동기 소리에
놀란 닭 홰를 쳐대면 막걸리 새참이 나고
달아오른 발동기를 세운 윗마을 덕수아재랑 청년들은
막걸리사발을 연신 비웠다.
발동기가 다시 돌고 일꾼들 부산한 몸짓에
보릿단 낟가리에 가렸던 사랑채 반쯤 보이던 때
토방 끝에서 달큰한 감꽃을 삼키다 보리 꺼시락이 목에 걸렸다.
컥! 컥! 목을 흔들 때 마다 꺼시락은 목구멍을 기어들어
금방 죽을 것 같은 무섬증에 비명을 섞어 울었다.
황급히 달려오신 할머니 모시수건 검지에 감고서
목구멍 몇 번을 걷어내 모시수건 껄끄러운 틈에
굵은 꺼시락을 건져내셨다.
겁에 질린 눈물 훔쳐 주시고 사탕하나 물려주신 할머니!
나는 입안을 흐르는 단맛에 금방 죽을 것 같은 무섬증을 삼킨 채
사탕 물고 잠들어 낮도깨비 번쩍이는 꿈에 온 몸을 떨며 눈을 떴다.
경기든 손자를 품에 안고 주문을 중얼대던 할머니의
오장을 흔들던 아득한 가락 귓전에 살아나고
눈시울에 괴었던 흥건한 눈물 오늘밤 내 눈에 있다.
♧ 은행, 그 작은 비원 - 김윤자
노오란 가을 하나
차가운 아스팔트 길 위에
구르고 있다.
떨어지는 아픔보다
깨어지는 슬픔이 더 클 것 같은.
뜸북새 울음으로
농익은 고독을 벗기고 나면
물빛 수국의 꽃봉으로
솔길을 걸어 나오는 동그란 소녀
뽀얀 희망이다.
품어 가야할 고향이다.
푸른 연민이다.
파르르 떠는 찬 눈에
마른 입술로 풀어내는 아리아
그대 발길에 채이기 보다
그대 손길에 들려 가고 싶다고.
고요한 향기 속에 흐르는
그 작은 비원, 가슴이 시리다.
♧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리 - (宵火)고은영
눈물 같은 모짤트를 들으면서
삶의 한계를 통감하는 의식이
고요히 웅크린 잠이 들 때
여전히 휘몰이로 날아오르는 외로움
어쩌면 안개처럼 피어 오르다 사라져 간
천국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하늘 끝자락
일출봉 바다 유채꽃 일본 수국 문주란
까마귀 쪽 나무 기다란 잎새 안개 바람 갈대 양어장
잊혀 진 그리움들이 잿빛 구름으로 떠돌다
폭우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다
청춘을 누리던 무량한 사랑도 까마득하고
하루 또 하루 의미 없는 인생의 페이지가
마농지처럼 질기다고 몸부림치던 시간을 월장한
꿈의 영지에조차 여전히 굽이치는 슬픔의 자락들
영원한 지평 어디쯤
우리는 잊혀 진 시대 잊혀 진 거리
잊혀 진 언어로 다시 만날지 모른다
그때 다시 저 어둠의 신작로
잊혀 진 꿈을 찾아 밤을 새워 헤매다
굽은 등으로 심지를 당겨 고독한 등불을 밝혀 들고
한 송이 장미가 피기를 기다리며 우리는
잊혀진 꽃길에 잊혀 진 얼굴로 다시 만날지 모른다
♧ 흐르는 강물처럼 - 최원정
괜찮다
너무 애쓰지 마라
세월이 흐르다보면 묻혀 지겠지
걱정하지 마라
그러다 신경줄까지 끊어질라
심장혈관질환에 이어
암투병중인데
아서라, 또 다시 고장날라
백팔염주같은 여섯개의 알약을
매일 털어 넣으면서 연명하는 목숨 줄
산수국꽃이 피듯
수시로 드는 푸른 멍
흐름대로 놓아두자
섭리대로 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