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향기

두루미천남성과 ‘표고목’ 외

김창집 2012. 6. 19. 00:10

  

얼마 전에 오름에 갔다가

이 두루미 일행을 만났다.

누가 이름을 붙였는지 모르지만

기가 막히다.

 

지금처럼 비가 왔으면

꽤 오래 갈 건데

가뭄이 심하여

자꾸 말라비틀어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정드리문학회 동인지 제3집의

남은 시조들을 같이 싣는다.  

 

♧ 표고목 - 이진수

 

표고목은

누워 잠들지 않는다

 

무릎 아래 것들이

새우잠으로 움츠러들거나

가위눌리지 않도록

늘 서서 잠든다

 

표고목이

선 채 잠들 수 있는 것은

그들 어깨의

기울기 때문이다

 

 

기댐과 떠받침

기대면서 동시에 떠받치는

절묘함 때문이다

 

어디서 왔는지

뭐라 말할 수 없는

기울기가

스러지는 날

 

그날이

딱 하루

누워 잠드는 날이다.   

 

 

♧ 복사골행 - 이태순

    

먹구름만 스쳐가도 검정 때 묻을까봐

날개 톡톡 털어내는 꽁지 짧은 새가 날고

연둣빛 봉긋해지는 마을일 것 같았다.

 

얇디얇은 복사꽃 발그레한 숨소리

한 잎 두 잎 포개보는 봄날 떨리는 봄날

안달 난 생각은 벌써 마을 몇 번 다녀왔다

 

장지문 달빛 홀려 하르르 뱉어버린 말

행여 당도하기 전에 그 말 떠내려갈지 몰라

며칠째 눈 꼭 감아도 흰 발목이 다 젖었다  

 

 

 브라우스 한 벌 - 정경화

   --베트남 신부

 

엄마가…

친 엄마가…

나를 내다

걸었어요

 

알록달록

마흔 벌 중

유두빛

분홍이었죠

 

낯설은

손목에 덥썩,

제비 뽑듯

뽑히데요

 

 

 

말끔히

다려졌지만

잇자국

선명한데

 

어느 새

낡은 툇마루,

젖먹이 딸

안고 있어요

 

이제야

그립습니다

달빛 뒤의

그 한 사람!  

 

 

♧ 불선여정(不宣餘情) - 정끝별

 

  쓸 말은 많으나 다 쓰지 못한다 하였습니다 편지 말미에 덧붙이는 다 오르지 못한 남은 계단이라 하였습니다

 

  꿈에 돋는 소름 같고 입 속에 돋는 혓바늘 같고 물낯에 돋는 눈빛 같이 미쳐 다스리지 못한 파문이라 하였습니다

 

  나비의 두 날개를 하나로 접는 일이라 하였습니다 마음이 마음을 안아 겹이라든가 그늘을 새기고 아침마다 다른 빛깔을 펼쳐내던 두 날개, 다 펼쳐냈다면 눈멀고 숨 멎어 가라앉은 돌이 되었을 거라 하였습니다

 

  불쑥 끼어든 샛길들목에서 저무는 점방(店房)처럼 남겨지는 일이라 하였습니다 봉인된 이후에도 노을을 노을이게 하고 어둠을 어둠이게 하며 하염총총(何念悤悤) 하염총총 저리 수북한 바람을 때맞춰 때늦은 바람이게 하는 지평선의 목메임이라 하였습니다

 

  때가 깊고 숨이 깊고 정이 깊습니다 밤새 낙엽이 받아낸 아침서리가 소금처럼 와 앉았습니다 갈바람도 갈앉아 불선여정 불선여정 하였습니다

  

 

♧ 꽃의 변주 - 홍성운

 

1.

왜 그리 부산떨지 풀잎 흔드는 아지랑이…

누군가 한 움큼 꺾어 마른 꽃이 될지언정

내 분첩 단박 터뜨려

이 봄을

물들일까봐

 

2.

여름 땡볕에는 왠지 짐승이고 싶다

사향낭 몸에 품고

이저리 누비다가

선 굵은

나의 등짝에

줄무늬를 넣을까봐

 

 

3.

설령 향기 없대도 단풍 숲은 꽃밭이다

물이 들면 드는 대로

마르면 마른대로

가을엔

그냥 매달려도

종소리가 새나온다

 

4.

혹한을 참느라 볼이 발간 건 아니다

눈 속을 비집고 나와

주위를 살펴보면

저마다

얼음주머니를

허리춤에 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