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향기

고 정군칠 시인을 추모하며

김창집 2012. 7. 9. 09:01

 

우리의 문우(文友)인 정군칠 시인이

유명을 달리했다.

 

며칠 전 면회를 끊은 병실을

어쩔 수 없이 방문했을 때

안타까웠던 마지막 모습이 눈에 밟힌다.

 

제주작가회의 이사인 정군칠 시인은

중문에서 태어나 1998년 ‘현대시’로 등단하여

2003년 시집 ‘수목한계선’

2009년 시집 ‘물집’을 발간했고

2011년 제1회 서귀포문학상을 수상했다.

 

빈소인 부민장례식장에서 오늘(7/9) 일포제를 지내고

내일 아침(7/10) 7시 발인, 제주시 양지공원에서 화장한 후

그의 고향인 중문 베릿내 해안가에 뿌려진다.

 

그의 두 번째 시집 ‘물집’에서 시 몇 편을 골라

개망초 두어 줌 꺾어 영전에 바치며

삼가 명복을 빈다.   

 

 

♧ 시인의 말

 

바다 밑 끓던 용암이

섬 오름 봉분을 만들었다

 

내 안의 불화들이

살갗 아래 물집을 만든다

 

누구는 맹물로 그림을 그린다는데 나는 굳이 먹으로

흔적을 남기고 만다

 

2009년 여름

정군칠   

 

 

♧ 달의 난간 - 정군칠

 

파도는 부드러운 혀를 가졌으나 이 거친 절벽을 만들었습니다

 

열이레 가을달로 해안은 마모되어 갑니다 지워지다 이어지고 이어졌다

끊어지는 신엄의 오르막길, 바다와 가장 가까운 벼랑에 이르자 누군가

벗어놓은 운동화 한 켤레가 가지런히 놓여있습니다

 

생의 난간에 이르면 달빛 한 줌의 가벼운 스침에도 긁힌 자국은 선연할

터인데 내 안의 빗금 같은 한 무더기 억새, 바싹 다가온 입술이 마릅니다

 

생애生涯의 끝에 이르러 멈추었을 걸음 망설임의 흔적인 듯 바위틈에

간신히 붙은 뿌리, 뿌리와는 달리 땅 쪽으로 뻗은 가지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습니다

 

누군가 온몸으로 지나간 길, 마음 한 번 비틀어 曲을 만들고 마음 다시

비틀어 折을 만들었으나 길 밖을 딛었을 자의 흔적은 허공뿐입니다

 

자주 바람 불어 달이 잠시 흔들렸으나 죽음마저 품어버린 바다는 고요합니다 

 

 

♧ 붉은 꽃으로 가다

 

저것들,

헤픈 듯한 웃음을 흘리며 길모퉁이에 서 있다

 

꽃잎 안을 살며시 들여다 본다

반점 같은 씨방이 고요히 잠들어 있다

벌거벗은 내가 잠들어 있는 자궁 속이

저리 푸르다

저렇게 푸르다

 

칸나에게로 가면

붉은 꽃잎으로 둘러싸인 생명을

볼 수 있다

까맣게 숨어 있는 나를

들여다 볼 수 있다   

 

 

♧ 바다의 물집

 

환한 빛을 따라 나섰네

 

지금은 달이 문질러 놓은 바다가 부풀어 오르는 시간

여에 부딪치는 포말들을

바다의 물집이라 생각했네

부푸는 바다처럼 내 안의 물집도 부풀고

누군가 오래 서성이는 해변의 밤

온통 흰 꽃 핀 화엄의 바다 한켠

애기 업은 돌을 보았네

그 형상 더욱 또렷하였네

 

제 몸 밀어내고 다른 몸을 품고서야 바다는

해변에 닿는다지

버릴 것 다 버린 바다의 화엄이

저 돌로 굳은 것일까

걸러내야 할 것들이 내게도 참 많았네

목이 쉬도록 섬을 돌았네

단지 섬을 돌았을 뿐인데 목이 쉬었네

 

파도의 청징淸澄한 칭얼거림이 자꾸만 들려왔네

깍지 낀 손 풀어 그 울음 잠재우고 싶었으나

달빛은 바다 위에서만 출렁거리고

나는 서늘한 어둠의 한켠에 오래

오래 머물지 못했네   

 

 

♧ 모슬포

 

모슬포에 부는 바람은 날마다 날을 세우더라. 밤새 산자락을 에돌던 바람이 마을 어귀에서 한숨 돌릴 때, 슬레이트 낡은 집들은 골마다 파도를 가두어 놓더라. 사람들의 눈가에 번진 물기들이 시계탑 아래 좌판으로 모여들어 고무대야 안은 항시 푸르게 일렁이더라. 시퍼렇게 눈 부릅뜬 날것들이 바람을 맞더라.

 

모슬포의 모든 길들은 굽어 있더라. 백조일손지묘(白祖一孫之墓) 지나 입도 2대조 내 할아비, 무지렁이 생이 지나간 뼈 묻힌 솔밭 길도 굽어 있더라. 휘어진 솔가지들이 산의 상처로 파인 암굴을 저 혼자 지키고 있더라. 구르고 구른 몽돌들은 입을 닫더라. 저마다 섬 하나씩 품고 있더라.

 

날마다 나를 세우는 모슬포 바람이 한겨울에도 피 마른자리 찾아 산자고를 피우더라. 모슬포의 모든 길들은 굽어 있더라. 그래야, 시절마다 다르게 불어오는 바람을 껴안을 수 있다더라. 그 길 위에서 그 바람을 들이며 내 등도 서서히 굽어 가더라.     

 

 

♧ 나비 상여

 

외따로 난 산길

 

나비 날개를 어깨에 멘 개미들 간다

 

죽어서 맴돌기를 멈춘 나비

 

오색무늬 제 몸이 만장이 된다  

 

 

♧ 빈방

 

삼태성三台星 막 돋는

저녁 무렵

 

왜가리 날아와

금붕어 한 마리 물고 갑니다

 

연못에

빈방 하나 생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