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詩 5월호의 시들
♧ 녹음 아래서 - 김석규
훈풍 불어와 잎새마다 싱그런 날은
푸른 물빛 포식하고 천치가 되어
한나절 늘어지게 낮잠이나 잘까
헤 헤 헤 까닭없이 터져 나오는 웃음
중독도 예사 아닌 지독한 중독으로
헤 헤 헤 웃다 웃다 배꼽을 잡아 뺄가
물어뜯어라 능구렁이 온몸 칭칭 감아
훈풍도 불어와 잎새들 싱그런 날은
♧ 김립金笠 - 정일남
갈대밭을 어서 벗어나시오
징검다리를 건너면 밥 냄새 나는 마을이 있으리다
고맙기는 하나 나는 낮달을 따라가겠소
사유의 모색을 문자로 읊으니
구름은 앞장서고 나비도 따라 오는구나
시대를 향해 정면으로 맞서지 못하고
칼보다 지팡이였고 밥보다 시 한 수였다
몸의 균형이 어긋나고 구체성을 잃을 때
풍문으로도 처자식 소식 들을 수 없어 객수로 요기를 했다
개가 짖는 마을이었다, 짚더미 깔고 잠 설치는 밤
논 개구리 아이처럼 칭얼대기만 하고
아낀 제월霽月이 나룻배처럼 건너온다
인간의 비린내는 외롭고 친근했다
나름대로 풍자한 세태는 시의 봇짐에 담았고
♧ 장미 2 - 조병기
미움이 사무쳐
분노의 정념으로 피어난다
가슴을 후벼 파도
풀리지 않는 상처의 불심지
그대로는 살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다고 외치다가
늦가을 서리 바람에
야윈 가슴 쓸어안고 떠나느니
하늘에 가서나 용서가 될까
잠들지 못하는 지상의 넋
♧ 천산산맥의 능선처럼 - 김백겸
대학교 산책로에서 본 여학생에게 첫사랑을 느끼고 연애의 상처로 이십
대를 보냈지요
신문광고로 본 연구소 채용광고에 응시해 직장을 얻었으며 미팅 펑크가
난 자리에 대타로 나갔다가 대신 결혼의 짐을 지게 되었습니다
신문사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된 일로 시인의 관사를 무겁게 머리에 쓰
고 다녔습니다
직장에서는 승진 때문에 청춘이 도끼자루 썩어가는 줄도 모르고 일했
지만 남은 일생은 황사가 심한 날의 모래먼지였습니다
인생의 미로는 진흙탕 길이었나 싶으면 눈앞이 열리면서 아스팔트포장
길이 나왔습니다
밤꽃에서 딴 꿀맛이었나 싶으면 코브라 독약이었습니다
두 눈이 큰 사슴인줄 알았더니 어느새 구미호롤 몸을 바꾸었습니다
한낮의 쐐기풀 같은 눈길이더니 황혼에 장미꽃 홍조가 든 얼굴이었습
니다
정년을 앞둔 몸의 컨디션을 위해 새벽의 아스팔트를 달리고 있었는데
노쇠가 죽마고우처럼 어깨를 나란히 달리고 있었지요
회사의 컴퓨터를 부팅하고 커피를 들면서 밤새 도착한 이메일을 보고
있는데 권태가 공문과 회의일정과 스펨메일을 분류하고 있었지요
KTX를 타고 오는 저승사자를 잊을 만한 놀이가 없을까 하여 나는 수첩을
뒤적여 친구에게 키르키스탄의 천산산맥 트레킹을 제안하는 중입니다
♧ 이산離山 - 김윤환
설악산雪嶽山을 보노라면
금세 위축이 된다
구릉지 한 점 없는 맹렬한 준령과
범접할 수 없는 꼭대기의 백설
산 중턱에서 발길을 돌리며
염치없는 상념이 든다
팽창한 고요를
산 아래로 옮길 수만 있다면,
새벽 자운紫雲이 입김처럼
나를 적실 수만 있다면,
상쾌한 적막을
외투처럼 입을 수만 있다면,
내 몸이 준령을 감싸는
바람도 되고 소리도 된다면,
가파른 절벽 두려워
도망가지 않을 수만 있다면
그 안일한 상상이
신작로에 닿을 무렵
이천 년 전 헤르몬 산 아래
가이샤라 빌립보 도성 가운데
옮겨진 한 청년의 이산離山
그 산이
내 앞에 내려와 있네
♧ 율법이란 - 박원혜
가슴에
사랑이 없거나
빛 바랬거나
현저히 줄어 들었을 때
사람들은
외도를 하고
반면, 율법을 지키라고
크게 크게 소리 지른다
고래 고래 소리친다
법을 지켜라
율법을 지켜라
가정을 지켜라
아내에게 충실하라
남편에게 충성하라
고래 고래 소리친다
공허하게 질러댄다
♧ 명함 - 김희정
수십 년 만에 초등학교 동창 모임 갔더니
안부보다 먼저 명함을 주고받는다
받은 것이 있으면 주는 것도 있어야 하는데
받기만 하다 보니 슬슬 눈치가 보인다
술잔이 돌고
집 이야기 차 이야기 투자 이야기에
추억은 어느새 구석으로 밀리고 만다
집에 돌아와 명함을 보니
어릴 적 친구들 모습 떠올랐다
찌질이었던 성철이는
부동산 투자로 이름만 대면 아는 외제차를 타고 왔다
제대로 말도 꺼내지 못한 순자는
아들 둘을 서울대에 보내 교육전문가를 자처했다
친구들이 라면땅을 빼앗아 먹어
눈물 콧물 짜며 선생님께 일러 바쳤던 인수는
증권으로 크게 재미를 봤다며
애널리스트 뺨치는 말솜씨를 자랑했다
30년이 지난 지금
변한 것 없이 사는 것은 나뿐이었다
변변한 명함 한 장 장만 못한 삶
인사동 골목을 걷다
누군가 “김 시인” 하며 부를 때
나 말고도 돌아보는 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 장면 생각하면
내가 시인입네 하는 마음 들킨 것 같아
아직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 진달래 - 정하해
밤을 꼬박 세웠다
이 가난한 잠자리 두드리기만 할 뿐
누가 말이 없다
멀리서 산의 두근거리는 소리
밤새 저를 설치다
득달같이 달려와
불쑥
들이미는
이것, 낳느라
산이 엄청 아팠겠다
♧ 미시적 결론 - 이정섭
여기 없는 아버지는 땀을 흘린다 여름 한낮을 적시는 새치 몇 올과 러닝
셔츠의 시간 밖으로 배출되는 잉여들 자전거의 균형은 땀방울을 배반하지
않지만 쏜살같이 등 뒤로 사라지는 동산외과 성남철물점 푸른사진관 절대
로 먼저 손 내미는 법 없었던 자전거의 목적지를 나는 모른다 아버지도 아
마 상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네거리에 멈춰 선 자전거는 전적으로
우연이었다 오른편 순대집에서 당면이 많이 담긴 순대를 우연히 얻어먹었
고 역시 우연히 아버지는 막걸리를 마셨다 노랗게 가라앉은 술찌끼 속에
서 무척 지루한 표정으로 산양 같은 몸짓으로 까까머리 아이들이 몰려나
올 것만 같았다 공놀이는 그래서 진작부터 효용 없는 놀이였다 벽을 등지
고 튀어나오는 탄성력의 수치와 반응속도를 가늠하는 건 순전히 눈짐작이
었으니까 공과 벽 사이 무수한 공간에서 휘슬은 여전히 피부 색 다른 나랑
은 무관했고 자전거와도 무관했고 자전거 뒷자리를 휘돌아가는 바람의 의
도와도 무관했으니까 집에서 멀지 않은 곳 비구름으로 진화하는 도시의
열기가 가끔 메슥거렸을 뿐 러닝셔츠가 얼룩덜룩 말라붙은 네거리 파출소
를 돌아 잔뜩 기울어진 모퉁이를 몰고 가는 자전거 거기 없는 아버지는 땀
을 흘린다 그러므로 균형 잃은 아버지의 땀내는 필연이다 새끼손가락을
흔드는 누군가의 입김처럼 완간되지 않는 자전거의 자서전처럼 땀을 쏟는
페달 어디쯤 극사실주의의 숭배자는 메두사라는 증거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