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향기

‘작가와 사회’ 여름호의 시와 봉의꼬리

김창집 2012. 7. 22. 00:22

 

‘작가와 사회’ 2012년 여름호를 읽었다.

진즉에 받은 책이지만 어쩌다

다른 책 밑에 겹처져

이제야 보게 된 것이다.

늦었지만 시 8편을 골라 엊그제 찍은

봉의꼬리 사진과 함께 올린다.

 

봉의꼬리는 양치식물 고사릿과에 속한 여러해살이풀로

뿌리줄기는 옆으로 짧게 자라고 흑갈색 털이 있다.

생식엽은 길이 20~60cm이며, 영양엽은 그보다 훨씬 작고

가장자리에 톱니가 있다. 포자낭군은 뒤로 말린 우편(羽片)의

가장자리에 달린다. 우리나라, 중국, 일본, 타이완 및

인도차이나 등지에 분포한다.  

 

 

♧ 달 판타지 - 유병근

 

가을저녁엔 느닷없이

우물 속의 옛날을 길어 올린다

우물에 잠긴 뒷산 산울림과

산울림에 흔들리는 달을 길어 올린다

두레박 가득 출렁이는 유리파편

옛날을 어루만지다가 파편에 찔린다

가을저녁엔 피리를 불며

아직 불러보지 못한 이름을 찾아

우물 깊이 두레박을 던진다

옛날은 옛날의 두레박으로 가고

넋두리를 감싼 달빛 한 올

끊어질 듯 말 듯 흔들리고 있는

두레박 끈에 매달린 나를 본다  

 

 

♧ 봄의 행로 - 김미령

 

  가라앉아 있던 수상한 기름띠가 수면에 어른거리면 그때를 봄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물풀이 자라는 속도, 몇 개의 돌이 떠내려가고

  새로 붙인 취미에 네가 침을 뱉을 때 그때를 여름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행패 부리다 떠난 가족은 어떻게 홀연히 나타나는가

  여전히 구덩이 근처를 맴돌면서도 우리는 왜 몇 가지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사랑하는가.

  줄었던 가족이 다시 채워지고 나는 연필을 몇 개째 씹어대고 있을 무렵

  떠날 때 재로 만든 다리를 이어 죽었던 소식이 어떻게 제 발로 걸어들어오는가. 그때마다 꽃은 왜 무더기로 피고

  이마에 밝히며 다가오는 검은 구두를 뽑아던지지 못하고 엄마는 왜 따뜻한 밥상을 차리는가.

  오래전 좋아했던 사람에게서 ‘행운의 편지’를 받던 날

  섬뜩한 행운이 그동안 어딜 헤매다 내게 도착한 건지.

  가끔은 떠돌지 않고 머물고 싶은 불행의 거처가 저 꽃ㅍ피는 언저리가 아닌지.

  빚 받으러 온 사람처럼 문 앞에 서서

  행운이 비 맞고 서서

  흐려지는 얼굴들을 보다가 돌아갔을 크리스마스의 반짝이는 어느 저녁을 생각한다.

  친구들과 우르르 식당으로 가다가 웅덩이에 떠 있는 검은 무지개를 무심코 밟고 지나가던 어느 날

  선물 받은 내 곰인형을 끌어내 청소차에 내던지고 있을 엄마의 그때를

  다시, 봄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 청바지 2010 - 김점미

 

독일에 와서,

십 년을 넘게 입어왔던 청바지를 버렸다

너무 헤져 다 찢어질 때까지도 아꼈던,

살결처럼 익숙해진 것을

차마 내손으로 못 버려 여행지에 그대로 두고 나왔다.

 

지난 해, 지질이도 불운했던 한 해 동안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보냈다

존재마저 잊을 만큼 익숙했던 그들이

각자의 이유로 한꺼번에 내 곁에서 사라졌다.

피를 나눈 사람과 피를 나누지 않는 사람 사이에 놓인

이별의 차이는 절망과 분노.

그러나 내겐 30년이 된 친구의 이별 역시 절망에 속했었다.

 

청바지의 두 가랑이가 움켜쥐었던 시간보다 길게

나와 연대했던 우정 이상의 무엇이

버려진 청바지보다 가볍게

쓰레기통 속으로 떨어져 내릴 줄 정말 몰랐다

위대한 가난은 더욱 연약한 인간의 혓바닥을 핥으며

우리를 이간했지만

 

실올이 풀려도 끊어지지 않았던 마음 속 청바지처럼

늘여놓은 그 세월의의 헤진 마음속에서도

인연으로 꽁꽁 묶인 엉킨 실타래, 끊지 않은 채

그 믿음 또한 그대로 둔 채

살그머니 방을 빠져나오고 싶었다.  

 

 

♧ 꽃 몸살 - 동길산

 

꽃은

피면 핀다고 아프고

지면 진다고 아프다

손을 대어 짚어 보아라

절절 끓는 이 뜨거움

꽃이 뜨거운 것이냐

손이 뜨거운 것이냐

피는 꽃 짚어 보느라

지는 꽃 짚어 보느라

몇 발짝 걷다간 멈춰 서는

뜨거운 봄날. 

 

 

♧ 모란이 활짝 - 정미정

 

  초등학교 때 보고 처음이야 깜짝 놀랐지 붉은 실크 자르르 휘감은 몸 금목걸이 금팔찌에 아찔한 향수라니 영락없는 귀부인 멀찍이서 지켜보았지 이름까지 바꿨다길래 필시 사연이 있을 거라 한두 잔 술이 돌고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웃어제끼는 네 눈도 돌았지 불현듯 금니가 다부지게 박힌 번쩍거리는 입을 들여다보고 싶어졌어 짙은 향기에 빨려들 듯 너의 웃음 앞에 바짝 얼굴이 디밀고 앉았는데 네 밑을 흐르는 깊은 곤궁의 냄새, 설마 하는데 취했던지 일어서다 넘어지는 네 치마 속을 보고 말았어 어쩐지 치마가 길다 했더니 가랑이에서 도망치던 검붉은 피멍이 허벅지에 주저앉아있었어 때마침 핸드폰이 울었고 액정에 띄워진 커다란 시계를 보자마자 넌 기겁을 하며 냅다 핸드백 머리채를 잡아채고 뛰었지 반쯤 얼빠진 가방에서 때 묻은 화장지니 다 닳은 립스틱이 떨고 있는 애들 마냥 떨어졌지  

 

 

♧ 기념사진 - 조말선

 

  열두시에 했습니다 열한시 오십분부터 진행된 일이지만 일초, 이초 지나가버린 것처럼 몇 사람이 빠져나갔습니다

  한 곳에 모였기 때문에 여러 장소에 있었습니다. 열두시는 곧 흩어집니다

  옆 사람을 모르기 때문에 어깨에 손을 얹습니다 열두시부터 다정해졌습니까 다정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까 일초 이초 지나갔으므로 무르익을 것을.

  지금부터 달라질 것을 약속합니다

  모두 나를 보고 있군요

  나는 거기 없는 것이 확실합니다

 

  모두 여기를 보고 있군요  

 

 

♧ 카페 프리즘 - 천종숙

 

둥근 테이블 위

주전자 섬이 채워놓은 잔속의 바다

한 잔 가득 넘칠 듯 출렁이지만

한 방울의 바다도 흘러내리지 않는다

갈매기도 마시고

망둥어도 마시고

너는 눈으로

나는 가슴으로

마셔도 마셔도 언제나 한 잔 가득 출렁이는

마티니 한 잔의 노을바다

잔과 잔이 부딪칠 때마다 부서지는 햇살

작은 섬 하나가 품은

아흔아홉 잔의 축배  

 

 

♧ 장지(葬地)에서 - 함기석

 

너의 마지막 숨이 분홍 꽃잎처럼 떠다니다

날을 세워 가슴을 깎는다

검은 포도송이처럼 나의 육체에도 다닥다닥 붙어있는 죽음

한 알 따 입에 넣고 혀로 굴려본다

 

빨간 잇몸을 드러내고 백발노인처럼 웃는 해

허공은 무한다면체 눈을 가진 암흑 생물체고 기이한 묘지

빛과 어둠 사이에서, 말의 여백과 공포 사이에서

나의 육체는 파동이 되어가고

 

검은 새 난다

계속 나뭇가지를 물어다 자신의 유골항아리 둥지로 옮기는 새들

새의 부리엔 애벌레처럼 꼬물거리는 햇빛

누가 공중에 옮겨놓은 뇌일까 저 구름은

지상의 척추에서 하늘로 무수히 뻗어가는 경동맥 핏줄들

 

웃으면 입에서 돌계단이 쏟아지던 너의 유머처럼 이제

아침은 입술이 없고

우리의 생은 지름이 0보다 작은 원

그 불가해한 도형의 넓이를 측정하려는 내 찬 손과 컴퍼스

그들의 탄식과 울음을 배경으로

 

아름다운 빛의 환각 속에서 소리 없이 종양이 퍼져가는 하늘

그 먹빛 하늘이 화선지 같은 대지로 천천히 스미고 있다

떠도는 꽃 떠도는 말 떠도는 너의 눈동자

허공이 숨긴 검은 뼈 사이로 눈물이 번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