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깨꽃으로 맞는 8월
8월, 김재범이 금메달 땄다는 뉴스가
한반도의 아침을 들썩이고,
함박웃음으로 새로운 달을 맞게 되었다.
이건 단순히 올림픽 유도 종목 금메달을 넘어선
4년 동안 절치부심하여 이뤄낸 소득이기에
한 사나이의 집념이 이루어낸 쾌거이기에
그보다도 온갖 부상을 이기고 따낸 성과이기에
더욱 값지다는 생각이 든다.
전날 왕기춘이 양팔 부상으로 인한 안간힘을 보았기에
각본 없는 드라마 특히 격투기 스포츠의 매력이 돋보이고
더욱이 그랜드슬램을 달성하였기 기쁨이 배가된다.
고소한 참깨가루, 참기름이 주는 맛은
바로 이 소박한 꽃에서 이루어졌나니….
♧ 참깨꽃 - 임영봉
山넘어간 누이야 깨꽃이 핀다
시집 못 가고 죽은 것을
들꽃보다 더 서럽고 가난한
깨꽃이 핀다.
이랑이랑 참참히는 씨앗을 넣으며
꽃을 볼 수는 있을라나
정말은 볼 수 있을라나
눈물 눌러 함께 심는 것을
나는 먼발치에서 보았다.
그러나 꽃은 끝끝내 피었고
이마를 두드리며 바라보라고 바라보라고
꽃대를 툭툭 두드려
꽃 지는 것을 못 견디는
살분홍 입술 사이로 반쯤 웃어보이던 누이여
깨꽃을 바라보면 면사공장
누이의 검정 치마폭에서
가지런히는 숨막히는 손가락들이
저승으로만 뻗어내리더니
깨죽 한 사발 수저 떨구고
예배당 종소리 따라가더니
깨꽃은 더는 차라리 지더라
♧ 참깨밭을 지나며 - 배교윤
애물스런 자식의
영혼 한 자락씩을 염주에 꿰고
산이 산을 잡고 선
장산(長山) 보리암으로
한산모시 치마저고리
은비녀로 쪽진 머리
하얀 버선, 옥빛 고무신 신고
구슬가방에 손수건 한장
칠월 백중날이면
하얀 참깨 꽃을 보며
긴 신작로를 따라
절에 가시던 어머니
곱던 시절
그 모습 생각 하고 있는데
어느 청산으로 마실 갔다 오는
흰 나비 한 마리
♧ 참깨를 볶으며 - 김경숙
빈집에 갇힌 지 여러 날
쌓이는 먼지를 붙들며
시간을 토막내고 있는데
환기통을 타고 전해오는 고소한 향기
무디어진 점막을 자극한다
한동안 잃어버린 식욕이 되살아난다
그래, 나도 참깨를 볶아 보자
닫힌 창문을 연다
싱그런 바람이 먼지를 쓸어내며
불씨를 힘껏 끌어안는다
적당히 달궈진 그릇 위로
알몸 드러낸 참깨는
뜨거운 열이 더해질수록
톡. 톡 고열을 토해내며
고운 빛깔의 옷을 갈아입는다
자신을 태워야만 발산하는 참깨여!
언제쯤 네 고소한 향기,
이웃에 전할 수 있으랴
♧ 참깨를 털며 - 정재영(小石)
깻단을 터는 마음으로
우리의 가을에
알알이 떨어지는 것들
있으라고
회초리를
장단지 치시던
손길
보이지 않으시니
깻단을 치는 마음으로
빈 쭉정이의 가슴을 친다.
♧ 참깨를 베면서 - 유용주
털고 말려 봐야 푸석 방귀에
까불어 볶아 봐야 고름 덩어리 엿기름에
쥐어짜야 땀과 눈물 콧물 밖에 나오지 않는 반거충이가
참깨를 거둔다
허리가 끊어질 것같다
반은 병들어 죽고 반은 튀어 떨어지고
어설픈 낫질에 뿌리째 뽑힌 줄기가 바르르 몸을 떤다
매달려 있으려고 얼마나 발버둥쳤던가
똥과 오줌으로 벽화 그릴 때까지 썩지 않으려고
세상이 나를 버려도
나는 끝내 세상을 버릴 수 없다고
뼛속 비어 가는 줄 모르고 꽃을 밀어 올렸는데
먼저 익은 것이 먼저 떨어진다
얼마나 쥐어짜야 향기가 나는 것이냐
덜 익은 씨앗이
반쯤 비어 있는 씨방이 기름이 된다
쭉정이가 세상을 살린다
썩어 거름이 된다
♧ 옛집 - 이기철
사랑이 있다면 네 손가락으로 달맞이꽃을
밀어올려 보렴
고통을 안쳐 한 그릇 밥을 지어보렴
이념과 체념, 동정과 연민이 들끓어 늘 뒤채이기만 했던
내 삶을
박꽃처럼 어루만져 보렴
사랑이 있다면 네 손으로
앞 물결만 따라가는 뒷 물결의 맹목을 회초리질해 보렴
발 다친 벌레도 병든 새도 없는 숲에
음악 같은 달빛을 밀어내 보렴
호명해도 이미 쑥갓꽃 같은 유년이 없는 여기
그러나 책장으로 잘려가지 않은 나무들이
가지 끝에 새를 보듬고
새들은 나무들을 하늘로 끌어올린다
물소리는 왜 노래인가
걸어다니지 않는 나무의 일생을 즐겁게 해주기 위함이다
만 사람이 밟고 가도 몸져 눕지 않는 길 끝
사랑이 있다면 피어나는 아픔에게도
이름을 달아주렴
지금은 없는 참깨꽃 같은 유년의
♧ 현고학생부군신위顯考學生府君神位 - 김인육
아버지가 꼭 너만했을 때였구나
연보라 참깨꽃이 초롱을 켜던 여름이었다
열한 살 어린 어버지의 손을 놓지 못한 채
할아버진 떠나가셨단다
생전엔 힘이 장사셨지
용돌이네 대건이네 할 것 없이
고향 동네 대들보란 대들보는 모두
할아버지의 어깨를 탄 것이란다
아무렴, 자식 사랑도 장사셨지
장날 해거름이면
막걸리에 취한 육자배기 가락을 좇아
눈오는 날 강아지새끼처럼 마중을 나가면
할아버진 어김없이 눈깔사탕에 무동을 태워주셨단다
그날 밤은 깊도록 달디단 눈깔사탕을 녹이며
반딧불이 호박꽃초롱을 켜고 동화처럼 잠이 들었지
그렇게 행복했단다
맘씨 좋으신 너희 할아버지가
도회지서 이사온 심주사의 보증을 앉기 전까지는 말이다
화병이 나셨던 게지 그렇게 술병도 나셨을 게다
3년이 넘게 빚보증에 시달리어 희나리같이 여위시더니
연자초롱 참깨꽃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
메케한 모깃불 연기가 봉화처럼 피어올라
온 동네 사람들까지 눈물 뿌리게 하던 날이 있었단다
아들아
오늘은 힘 장사 네 할아버지 26주기 기일이다
먼저 촛불과 향을 피우고 술을 세 번 나누어 붓고
절을 두 번 해야지
머리 조아려 발원도 해야지
세월의 강을 따라
네가 아버지가 되고 아버지는 할아버지처럼 떠나야 하듯
세월의 강을 되돌아
할아버지가 아버지가 되고 아버지가 네가 되는
신비한 마법을 익혀보자꾸나
뿌리를 더듬어보자꾸나.
♧ 바람 혹은 절망에 대하여 - 가영심
절망의 끝에 마주서면 무엇이 보입니까.
벽이 아니라 달려도 달려도
끝없는 벌판
그 가슴 한귀퉁이라도 죄끔 보입니까.
어떤 땐 불꽃 심장에 꽃을 피워서
끝나 가는 11月의 마른 철조망에다
시뻘건 코피쯤을 덕지덕지 발라 녹슬게 하더니
가시 엉겅퀴 넝쿨처럼 뻗어나는
바람의 그 알 수 없는 침묵에다
사랑이라는 기다림 하나를 실어다 주기도 하였습니다.
바람은 영혼의 노래입니까.
살아도 살아도 목숨 다할 때까지
곁에서 떠나지 않는 절망에 대하여
불면의 밤이면 대문 밖으로 나가
소금 한 웅큼씩 후이 뿌립니다.
잠든 꽃들 사이로 달빛 눈부시게 걸어다니고
잃어가는 하늘의 별과
지상의 아름다운 모든 순수의 것들을 위하여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우리들 가난한 마음을
하얗게 참깨꽃 시름없이 말라가는
단식하던 날들의 기나긴 목마름을 위하여
던지는 나의 물음은
바람은 절망입니까, 아니면 다할 수 없는 기도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