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카 일기

입추에 보내는 푸른 단풍

김창집 2012. 8. 7. 06:59

 

입추이자 말복인 오늘 아침

창밖으로 시원한 바람이 감돈다.

 

TV 화면에는 체조 양학선표 도마

금메달의 순간을 연속해서 보여준다.

 

뉴스에는 어제보다 더 더워

전력 비상이 심각할 것이라는

예보가 거짓말처럼 느껴지는

기분 좋은 아침이다.

 

지난 일요일 노로오름에서 찍은

아직은 가을이 느껴지지 않은

푸른 단풍을 내보낸다.  

    

 

 

♧ 입추(立秋) - 최홍윤

 

오늘 아침에는

어제보다 풀벌레 소리가 맑다

 

누가 여름이 아니랄까 봐!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에

새벽잠 설치고 대문을 나서니

가을이 성큼 서 있다,

 

서늘한 긴 장마로

맘먹고 나들이 한번 못한 여름

올 여름이야 좀 그렇고, 그런 여름이라서

간혹 들려오는 매미 울음만 애처롭다

 

가을이 오는 소리,

나뭇잎 흔들리는 소슬한 바람에

장맛비로 축 쳐졌던, 지난 나날만큼이나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다.

 

올 가을에는

어디에 빌붙어 살아볼 거나

벌써 근심스러운데,

아침저녁으로 우는 귀뚜라미도 그렇고

어스름에 멀어져 가는

두견새 울음도 그렇고

 

고향에

고향에 가서, 옛날 아버지처럼

가을이 붉게 타는 묵정밭에

허수아비 하나 세워놓고

 

콩깍지 따닥 따닥,

오색 물결에 타는 이 가슴, 한 저름 물고

가을 하늘 멀리 날아 가라고

참새와 콩새란 놈에게 부탁이나 하고

 

그 묵정밭에

내 마음 한 가닥 내려놓는

가을이면 좋겠다.   

 

 

♧ 입추 - 이미순

 

애써 감출 필요는 없습니다

 

이곳까지 다다르는 동안

후끈하게 달아 오르던 시간들이

영원하리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런대로

엷어져 가는 푸르름 사이로

알알이 영글어 가는 결실들이

보이는 듯 해

참 행복하기만 합니다

 

어쩌다

서늘해진 바람이 귀밑머리를

스치고 지나갈 때

불현듯 나타나는 낯 설은 모습이

익숙치 않아서

혼자 흔들려 보기도 하고

 

손끝으로 전해 오는

둥글어져 가는 감각들을

추스려 담아 놓기도 합니다

 

이제

점점 더 깊게 타 들어 가고 있을

붉은 가슴앓이를

그렇게 애써 감출 필요는 없습니다.  

 

 

♧ 단풍을 꿈꾸며 - 정이랑

 

투명한 의식의 껍질을 벗어내면서 몸안에 이상한 기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콸콸

불어나던 혈관의 수액은 흐름을 멈춰버리고, 눈·귀·손·발 기능에 금이 갔다 순간,

고통의 정적으로 뒤덮여 아무 것도 얘기 할 수 없었다 초록이 뛰어다니던 눈부신 갈

비뼈 사이에서 타들어가는 부푼 사랑, 꿈

 

언제부턴가 비틀어지며 가벼워지는 것을 꿈꾸었을까 하늘로만 향하였던 욕망의 가

지들을 아래로 늘어뜨린다 낮은 곳으로 내려앉으며 생각했다 묶여 있음에의 탈출은

황혼처럼 물드는 일 타인의 무심한 발길 몸으로 받으며 뒤를 보았다 몇 장의 잎들이

빈 땅에 볼 부비며 속죄하는 마지막을 연출하고 있었다 나는 그 안으로 걸어가는, 물

드 는 단 풍   

 

 

♧ 내 안의 벽을 허물며 - 제산 김대식

 

그동안 두껍게 쌓아온 내 안의 벽을 허문다.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외부와 단절한 나만의 세계

유일한 나만의 공간

무엇이 두려워 무엇을 지키려고

그렇게 비밀스럽게 쌓고 장막을 치고 살았을까.

내 안의 창고엔 비밀처럼 잠가둔 보이고 싶지 않은 것들

뭐 그리 특별할 것도 별것도 아닌

그리 비밀스런 것도 아닌 것을

그저 소중한 것인 양

비밀처럼 숨기고 쌓아두었다.

그렇게 쌓이고 쌓인 것

모두가 쓰레기 되어 이 구석 저 구석

어지러이 뒹굴고 다닐 뿐

이젠 전부 정리하고

깨끗이 청소하고 싶다.

 

 

그러나 치우기엔 너무도 쌓이고 쌓인 해묵은 것이라

어디서부터 무엇부터 해야 할지 그저 막막할 뿐

이미 녹슬고 삭아져 버린

닫힌 지 오래된 마음의 철문은

움직이면 그냥 부서져 버리고 말 것만 같은

열리지 않는 쇠창살

행복도 불행도 기쁨도 눈물도

다 내가 만든 나의 운명

사랑이란 달콤함에 마약처럼 취해버려

가슴속 생채기만 내고 그리움을 안고 사는

결국은 내가 만든 나의 족쇄

가슴속 꼬기 꼬기 쌓인 해묵은 그리움이

얼기설기 엉키어 청소조차 못 하게 묶여있다.

나의 삶 자국마다, 남은 내 생에도

기나긴 실타래로 금기되어 얽히어있다   

 

 

♧ 입추 2 - 정군수

 

피 먹은 단수숫대

돌담 너머로 모가지 피어오르고

고추잠자리 날개 위로 몰래

봄의 꽃넋들이 찾아온 게다

향기만 놓고 말라버린

들꽃이거나

물소리만 듣고 따라가 버린

산꽃이거나

설레는 바람결 사이

가을을 물들이며

하늘을 그린다

 

먼 들길에서 만난 꽃다지

아침 이슬에서

볏잎 사이 숨죽이던

가벼운 것 다 불러와

열 마리 스무 마리

발레리나 발끝으로

그네를 탄다   

 

 

♧ 立秋 즈음에 - 박태원

 

여 남은 폭염에 밤송이 벙거고

마지막 열기 예서 더욱 거세다

 

가야한다, 못간다

末伏과 立秋의 氣싸움이

시간 다투며 입추편에 기울고

 

몇달을 장악했던 아쉬운 꼬리내리며

앞대문을 나가는 각설이 형세

가을 편에 미소가 어우러 지네

 

코스모스 살랑대는 길

당연 하늘은 높고

코끝에 스민 바람 맛이 상큼하다

 

후덥지근 바람이 놀고 간 자리에

향이 나르는 바람

솔솔 걸어오는 가을바람   

 

 

♧ 입추 - 박인걸

 

싸리 꽃 필 무렵이면

풀벌레 노래 여운이 길고

초가을 햇빛에 익은

고추잠자리가 더욱 빨갛다.

맑은 호수에는

높은 하늘이 가라앉고

물 위를 걷던 소금장수도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

뒤뜰 오동 나뭇잎은

아직까지는 청청하다만

벌레 먹은 떡잎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린다.

푹푹 찌던 저녁 햇살이

산 그림자에 밀려나고

언덕을 넘는 저녁 바람이

옷깃으로 파고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