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기종 시집 ‘나쁜 사과’와 메꽃
최기종 시인이 시집
‘나쁜 사과’를 보내왔다.
1956년 전북부안에서 태어나
‘포엠만경 동인’,
교육문예창작회 활동을 하면서
1992년 ‘이 땅의 헤엄 못 치는 선생이 되어’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나무 위의 여자’
‘만다라화’
‘어머니 나라’에 이어
네 번째 시집이다.
현재 목포작가회의 회장
전남제일고등학교 교사로 있다.
♧ 나쁜 사과
사과는
받지도 먹지도 마라
아담이 받은 사과
낙원에서 쫓겨나게 했다.
백설공주가 먹은 사과
독이 있어서 죽을 뻔했다
친구에게 꼼수로 얻은 사과
속이 빠알게서 버렸다.
그런데 받아만 내는 사과도 있다.
그 나쁜 사과 때문에
사과들이 아우성이다.
♧ 동백꽃
그날 동백꽃에게
동박새가 물었지.
당신, 소원이 무어냐고
가슴앓이 꽃멍울
화알짝 피워냈는데 이제
마지막 소원이 무어냐고
당신은 대답했지.
푸른 하늘 바라보면서
하나도 둘도 셋도
‘대한독립만세’라고
동박새가 다시 물었지.
당신은 대답했지.
‘대한독립’이라고
동박새가 다시 물었지.
“마안세--”
♧ 새벽은 온다
가장 캄캄할 때
새벽은 온다.
어두운 밤의 갈기에
완전히 밀리고 절망할 때
새벽은 온다.
그믐밤 긴긴 죽음의
시퍼런 묘지를 열치고
뚜벅뚜벅 걸어서 온다.
가장 두려울 때
새벽은 온다.
족제비 살쾡이 으르렁거리고
검은 손이 목덜미 잡아가도
새벽은 온다.
믿음의 깊이만큼
주린 좀비를 몰아내고
양떼들 거느리고 온다.
가장 아파할 때
새벽은 온다.
꽃이 피어나는 아픔으로
온몸으로 피 흘릴 때
새벽은 온다.
이산 저산 소쩍새 소리
바우가 깨어지는 감격으로
새벽은 온다.
♧ 이 봄, 하나도 반갑지 않다
봄비 내리고
꽃송이 하나씩 터지는데
이 봄, 하나도 반갑지 않다.
남쪽나라
구럼비 바위 터지는 소리
피비린내 폭약냄새 때문에
이 봄, 꽃맞이도 부끄럽다.
이렇게 철없는 꽃 앞에서
그래도 이 봄,
꽁꽁 얼어붙어야 한다.
나라 잃은 것처럼
♧ 레드
그들의 고착이 이렇다.
통일을 바란다고
파업하고 농성한다고 해서
그들과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모두 빨갱이로 몰아간다.
몸도 빨갛고
눈도 귀도 말씨도 빨갛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빨간 장미를 좋아한다.
불타는 사루비아도
빠알간 목도리도 좋아한다.
어릴 때 빨갱이라면
온몸이 빠알갛고
머리에 뿔 달린 마귀로만 알았다.
그들이 잘못 알려준 것이다.
그들의 속은 너무너무 빨갛다.
♧ 희망버스를 타고서
85호 크레인 김진숙 만나러
부산역에서 시내버스를 탔다. ‘쉬쉬’ 하며
깔깔이도 날나리도 살살이도 우르르
올라타서 쇼바가 내려앉아도
버스가 좋아라고 한다.
이렇게 든든하게 달려본 지 너무
오랜만이라고 신이 나서
쌩쌩 잘도 달린다.
길 가던 사람들도 신기한 듯 바라보고
가로수도 네온사인도 상가들도 웃음꽃이다.
운전기사도 어깨에 춤이 가득
가속기를 붕붕 밟아댄다.
맞불 집회하는 롯데백화점 지나서
돼지국밥 오천 원이라는 갈매기집 지나서
공권력이 진을 친 영도대교를 건너서
경계의 경찰차 벽을 끼고서 한진중공업
김진숙 지도위원 만나러 간다.
모두들 엉치뼈에 불빛 하나씩 달고서
달밤 없는 세상 만든다고 달려간다.
♧ 수요집회
새를 품었던 15세
댕기머리 소녀가
그 집 툇마루에서
70여 생을 굴러 떨어졌는데
만신창이 된 몸뚱이
고향도, 부모도 다 버린 정신머리
그렇게 죽지 못해 살다가
가슴의 피, 삭이고 삭이다가
임신부 몸 풀듯이 토해 낸 고백
나는 일제의 위안부였다.
나는 대동아 공녀였다.
수요마당 뿌려지는 피눈물이
씨가 되고 싹이 되어서
그래서 접시꽃으로 피어난 85세
머리띠 동여 맨
15세 백발이
일본대사관 들머리에서
70여생을 주워 담고 있었다.
♧ 저 선을 넘으면
저 선을 넘으면
당연히 벌을 받겠지
세상 말세라고
벌떼처럼 쏘아대겠지
그런데 저 선을 넘으면
넓은 벌판이 펼쳐지고 거기
내 사랑도 속잎을 피운다고 하니
하지만 저 선을 넘으면
집도 절도 잃게 되겠지
내 행성도 무참히 깨지겠지
그런데도 저 선을 넘으면
겨드랑이 날개 돋아나고
임도 보고 뽕도 딴다고 하니
하지만 저 선을 넘으면
산맥이 기차게 달리고
바다가 춤춘다고 하니
철조망에도 꽃이 핀다고 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