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란과 열대야
연일 지속되는 열대야다.
지난밤은 제주어 학술모임이 끝나고
서너 차례 장소를 옮기며 소주를 마시고 와서
열대야도 잊고 그냥 잤다.
그런데 요즘 우리 집 난 화분 하나가
철을 잊고 꽃을 피워
고장난 지구를 입증한다.
그래도 언제면 시원한 소나기라도 내려
열대야 최장일 기록을 잠재울까?
♧ 열대야 - 김영천
도무지 식을 줄 모르는
열기,
부끄러움,
모올래 돌아 누우면
이제 속에서 치오르는 허열에
세상이 울렁거린다
다 벗어도,
명예나 권력이나
부에 대한 욕망까지 다 벗어도,
무엇이 아직 남아
내 지친 영혼을 덥히는가?
거대한 어둠조차
한 마디 대꾸하지 못하고
마냥 엎드려만 있는지
활짝 열어 놓은 창문으로는
너의 입김처럼
단내가 훅,
풍긴다
♧ 열대야 - 민정기
삼복을 부채질 하던
더위 따돌리려
잠을 청하는데
누가 날 부르네
들려오는
저 푸른 매미소리
삼복을 지우는가
밤도 잊은 채
풀잎 같은 음성으로
열대야를 밀어내며
더위 쫓는 그 울음이던가
여름을 업고 떠나가는
청량한 너의 울음 뒤엔
가을 풀벌레 소리 들리고
점점 내 곁에 오고 있네
♧ 난초 향기 속에 - 명위식
은은히 풍겨 나와
방안 가득 배여 있는 너의 향기
수줍은 여인의 숨결인가
속살은 시리도록 눈이 부시다
창 틈 실바람 타고
진동하는 향기에 매혹되어
자꾸만 너에게 가까이 가고만 싶어진다
그윽한 향기로 다가오는
너를,
무엇으로 반겨야 하리
그대 향기 닮아 나의 사랑 키우고 싶다
감미로운 네 향기에 흠뻑 취하고 싶다
♧ 蘭草 - 신석정
蘭草는
얌전하게 뽑아올린 듯 갸륵한 잎새가 어여쁘다
蘭草는
건드러지게 처진 淸秀청수한 잎새가 더 어여쁘다
蘭草는
바위틈에서 자랐는지 그윽한 돌 냄새가 난다
蘭草는
山에서 살든 놈이라 아모래도 山냄새가 난다
蘭草는
倪雲林예운림보다도 高潔고결한 性品성품을 지니었다
蘭草는
陶淵明도연명보다도 淸淡청담한 風貌풍모를 갖추었다
그러기에
사철 蘭草를 보고 살고 싶다
그러기에
사철 蘭草와 같이 살고 싶다
♧ 蘭草 옆에서 - 李豊鎬이풍호
생명의 길을 간다
더러는 즐거이, 힘겹게.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신이 마련한 에움길과
외골목길을 지나서 나의 巡禮者순례자는
곧고 가파른 길을 오른다.
꿈은 신이 주신 길
꿈 속
걸어온 길 위에
사시사철 바람 따라서
홀로 가벼이 흔들리며
살짝 드리운 허공.
삶을 돌이켜 보는
淸雅청아한 기상
(꿈에서 깨어나기 전에
순례자의 길을 걷고 싶다.)
꿈에서 깨어나
좋은 세상 살고 싶다.
♧ 열대야 끝내기 - 김내식
지구가 태양의 괘도를 돌다
정확하게 자로 재어
무더위의 꼬리를 잘라내는
가랑비속의 8.15정거장
더위 먹은 파도가 잠이 깨어
정신 차리고 달려와
뜨거운 백사장을 덮어씌운 후
열대야를 몰고 간다
대관령 텐트에서 잠을 자고
강릉으로 출근하는 직장인들이
여름의 짐을 차에 싣고
가을 집으로 돌아간다
해수욕장 텐트 옆 들꽃들과
그늘을 주던 평상위의 느티나무도
하늘을 향해 손 뻗치고
만세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