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롱나무 꽃잎을 보며
기다리고 기다리던 비가
하루 종일 내렸다.
밤공기가 서늘했지만
문을 열어놓지 못해 눅눅하다.
사람의 마음이란 간사한 것
그거 하루 비가 쏟아졌다고 지루하다니.
그래도 아침 공기는 한결 상쾌하다.
배롱나무는 부처꽃과에 속한 낙엽 소교목으로
높이 3~7m로 잎은 마주나고 윤이 나며,
여름에서 가을에 걸쳐 붉은색이나
흰색 등으로 꽃이 핀다. 중국 원산이며,
관상용으로 재배한다.
학명은 Lagerstroemia indica이다.
♧ 배롱나무 - 진경옥
8월, 늦은 비에도 마음이 젖는다
담양에서 화순까지
외길에 내리는 비를 걸어
정자에 오른다
몇 백 년을 버틴 진실이
정자의 뒤에 선 배롱나무에 있었다
뜨거운 철에도 서늘한 꽃을 올린
배롱나무의 배후
한 장 구름처럼 걸려있다
그렇게 떠있다
-면앙정 송강정 식영정
환벽당... 소쇄원...
아득히 올려다 뵈는 정수리에서
글 읽는 소리가 떨어진다
붉은 꽃잎들이 퍼런 댓잎으로
늦은 비에 섞인다.
♧ 배롱나무 꽃 - 예당 조선윤
화무십일홍이요
열흘 붉을 꽃 없다지만
석 달 열흘 피워내어 그 이름 백일홍이라
뜨거운 뙤약볕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꽃봉오리 터지던 날
진분홍 주름치마 나풀거리며
살랑이는 바람결에 살포시
미끈한 속살 내비치는 한여름의 청순한 화신이여!
제 안에 소리 없이 시들어가는 걸 알면서도
온몸 다해 다시 피워내어
폭죽처럼 터져 선혈처럼 낭자하다
반들반들한 수피에 붉는 간질 나무여
화려한 꽃그늘 밟으며
꽃 폭죽 맞으며 여름 가고
꽃 카펫 밟으며 가을 온다.
♧ 배롱나무 - 姜大實
추월산 관광단지 초입 급커브길
조심조심히 돌아서 내려가면
우측 길턱에 살포시
교통 표지판을 안고 있는
나무 한 그루 있다
예전엔 한갓 나무에 지나지 않았으나
어느 날 정처 없는 길 가다
우연히 만나서 길동무하고부터는
꼭 성자 같은 배롱나무
오늘도 길목을 묵묵히 지켜 서 있다
줄곧 서행을 당부하더니
어느새 앞질러 왔는지
보리암사에서 뵌 적 있는 부처님같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품 안에 꽃잠 든 표지판보다
더 잘 보이고 화사한 미소로
간절히 무사를 기도하는
언제고 마음밭에 기르고 싶은 나무.
♧ 배롱나무는 껍질이 없다 - 김종제
고운사 절간이
무덤처럼 고요하다
배롱나무를 언제 심어놓았는지
처마 끝에 매달아놓은 풍경을 닮았다
바람에 꽃끼리 부딪히며
범종처럼 댕댕, 공명을 울리고 있다
배롱나무는 껍질이 없다고
발끝으로 다가가 보니
맨몸처럼 빛난다
눈을 감고 손으로 더듬는데
상처 많은 뼈마디가 잡힌다
생에 오래 단련된 것들은
껍질이 사라지고 없는 것이라고
오래 묵은 산사나 무덤가에
배롱나무 심어놓은 까닭을 알겠다
뼈만 남은 저 나무를
엊그제 보고 온 것 같은데
이제는 쓰러져 와불이 된 사내
몸에 좋다고 껍질은 누가 뜯어가고
살도 없이
통뼈로 누워있는 당신
배롱나무 심어놓은 사람 죽으면
붉은 꽃 대신에
삼년이나 흰 꽃이 핀다고
대웅전의 누가 넌지시 일러주었으니
나도 당신 옆에서
고즈넉한 배롱나무로 서 있겠다고
옷을 벗는 것이다
♧ 배롱나무 꽃그늘 아래서 - 이정자
사랑아, 이제 우리 그만 아프기로 하자
피어서 열흘 가는 꽃 없다는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을 무색케 하는
배롱나무 꽃그늘 아래서 우리 뜨겁게 만나자
당신과 내가 눈 맞추던 처음의 그 자리로 돌아가
뜨거운 태양과 비바람을 견디며
배롱나무꽃이 백 일 동안이나
거듭 꽃 피워야 할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를
호숫가 노을이 다 지도록
가슴 속 그리움 다 사위도록
무언의 눈빛으로 나누자구나
서로에게 눈 먼 죄로 쉽게
해 뜨고 해 지는 날 없었을 것이라는 것을
흘러가는 강물에 띄워 보내며
배롱나무 꽃보다 더 화사한 사랑 하나
우리 생애에 새겨 넣자구나, 사랑아
♧ 배롱나무 꽃그늘 아래 - 이지엽
생이 아름다운 때가 있다면
필시 저런 모습일 게다.
귄 있는 여자의 눈썰미 같은 꽃
잘디잔 꽃술로 낭랑하게
예 예 대답하는
그러다 속상하는 일이라도 생기면
혼자서 짜글짜글 애를 태우다
말간 눈물 뚝뚝 떨구는
화엄이나 천국도 그러고 보면
멀리 있는 게 아니다
환한 손뼉소리 끝에
온몸으로 내 사랑 밀물져 오는 여름 한낮
장엄이라든가 경건이라든가
그런 사뭇 딱딱해지는 것이 아니라도
흩지 마라 네 슬픔 흩지 마라 얼굴 검게 탄 바람이
여린 가지의 맨살 나붓이 쓰다듬고 가는
그 잠시에 있는 것
그러면 거기 수만 송이의 꽃들이
죄다 부르르 떨면서 수만 갈래의 길을
우듬지로 위로 받쳐 올리고
나무들은 혼신으로 몸 바깥에 길을 내면서
여름 한낮은 짱짱해지고 짱짱해져서는
이윽고 보여지는 한 틈으로
시원하게 소나기 한 줄금 뿌리기도
하는 것이니
완전한 사랑이란 이를테면 그
소나기 같은 것일 게야
목마름의 절벽에서 飛流直下비류직하하며
산산이 깨어지는 물방울
몸과 마음의 경계를 깨끗이 지우는 일
몸도 잊어버리고 몸이 돌아갈 집도 다 잊어버리고
그게 우수수 목숨 지는 것인 줄 다 알면서도
여름 내내 명옥헌 꽃 지는 배롱나무
여자의 환한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 배롱나무 꽃 - 정진규
어머니 무덤을 천묘하였다 살 들어낸 어머니의 뼈를 처음 보았다 송구스러
워 무덤 곁에 심었던 배롱나무 한 그루 지금 꽃들이 한창이다 붉은 떼 울음,
꽃을 빼고 나면 배롱나무는 골격만 남는다 촉루라고 금방 쓸 수도 있고 말할
수도 있다 너무 단단하게 말랐다 흰 뼈들 힘에 부쳐 툭툭 불거졌다 꽃으로
저승을 한껏 내보인다 한창 울고 있다 어머니, 멏 만리를 그렇게 맨발로 걸어
오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