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카 일기

우리詩 9월호와 여름새우난초

김창집 2012. 9. 5. 00:21

 

 우리詩 9월호(통권 291호)가 일찍 배달되었다. 칼럼은 신현락의 ‘시의 윤리’, 신작시 28인 선은 조현석 김영호 송문헌 이보숙 김금용 최정남 박원혜 이규홍 권혁수 도경희 강태규 권순자 박은우 신원철 유진 한수재 조성순 김정학 이재부 도복희 지정애 김기화 최해돈 장수라 김경성 이환 임채우 신단향의 시를 실었다.

 

  우리詩 시평은 황정산 ‘소통의 시를 위하여’, 서평은 홍해리 시선집 ‘시인이여, 詩人이여’(손현숙), 황연진 시집 ‘달콤한 지구’(이병금), 내가 읽은 시 한편은 임보의 시 ‘연밭에서’(주경림), 마경덕의 시 ‘어처구니’(나병춘), 김춘의 시 ‘강물이 발목을 묶다’(김보숙), 신작 집중조명은 김옥전의 시를 전영관이, 박수빈의 시를 변종태가, 고전에서 생각 줍기(3)는 진경환의 ‘구법승과 시인’, 백정국의 영미시 산책(62)은 랜터 윌슨 스미스의 ‘이 또한 지나가리라’를 번역해 실었다.

 

  여름새우란은 난초과의 다년초로 높이 40cm에 달하는데 근경이 짧으며, 해발 600m 정동의 숲 속에 드물게 자란다. 위인경은 난상구형이며 2∼3개가 연결된다. 잎은 3∼5개가 속생하며 장타원형이고 길이 10∼30cm, 폭 3∼8cm로서 털이 없거나 뒷면에 드물게 단모가 있다. 꽃은 8월에 높이 20∼40cm의 화경에 10∼20개가 총상꽃차례로 달린다.

 

 꽃은 담홍자색, 포는 피침형, 예첨두인데 길이 1∼2cm, 화경은 자방과 더불어 길이가 1∼2cm 정도이다. 꽃받침은 길이 13∼18mm이고 끝이 길게 뾰족하며 옆 꽃받침잎은 젖혀진다. 꽃잎은 길이 12∼15mm이고 선형으로 끝이 젖혀진다. 새우난초는 열대와 아열대 지방에 많고, 전 세계에 약 200종, 우리나라에는 3종이 분포한다. 환경내성이 자생지 이외의 곳에서는 약하다. 그 동안에 찍었던 여름새우난초를 모아 우리詩 9월호의 시와 함께 올린다.  

 

 

♧ 기차 여행 - 김영호

 

기차 여행은 언제나 가슴을 설레게 한다.

마음에 비가 내리면 나는 기차를 탄다.

차창을 통하여 밝은 세상을 만나기 때문이다.

형제교회 실버 학생들과 소풍을 갔다, 밴쿠버까지 기차를 타고.

솜사탕을 먹는 어린이처럼 기쁨에 벅찬 실버들

기차 안을 화려한 꽃밭으로 만들었다.

고독할 때 나는 기차를 탄다.

옛 고향 친구가 앞자리에 와 앉아 포도주를 따라주고

여학생이 코코아 커피를 마시게 한다.

실버들도 서로 간식을 나누며 정담과 폭소로 우정을 키운다.

기차 여행은 육의 옷을 벗기고 영혼에 날개를 달아준다.

우울하던 마음이 맨발로 푸른 초원을 마냥 내 달린다.

실버들도 신발을 내어 던지고 들판을 마구 달린다.

기차 여행은 자연과 추억을 만드는 예술이다.

차창밖에 천국이 따라왔다.

베이커 산과 그 산에 방문 온 고국의 구름도 달려왔다.

스케짓 밸리의 광활한 대지와 밀밭이 뛰어오고

양떼 소떼들이 달려왔다.

캐나다 국경선에 마중 나온 밴쿠버의 갈매기와 유채꽃

비를 맞으며 다운타운 관광을 함께 해 주었다.

담배를 피우는 시계탑을 본 후

시애틀로 돌아오는 밴쿠버 기차역의 플랫폼,

이별을 아쉬워하던 갈매기는 이내 구름 속으로 숨고

유채꽃은 나보다 먼저 기차에 올라타 옆자리에 앉았다.

에드먼드역까지 따라온 천국이 학생들 가슴속으로 들어가

모두의 눈에 찬란한 태양이 웃고

얼굴에서 황금물결의 바다가 춤을 추었다.

기차 여행은 천국 순례를 하는 예술이다.  

 

 

♧ 자화상 - 최정남

 

지울 수 없는 회한이나 오욕 같은 것, 절망 같은 것

어떤 향기 나는 비누로 씻을 수 없는 설움 같은 것, 눈물 같은 것

씻으면 씻을수록 되살아나는 매캐한 고향의 내음새

빈 들녘의 마른풀향기 같은

노스탤지어

복분자술 한잔에 취한 붉은 눈시울  

 

 

♧ 고백의 향 - 이규홍

 

가시 돋친 목청으로

손사래를 치면서

눈엣가시인 양

험하게 바라보는 것도

가시 깊은 곳

그 안에 숨겨 둔

첫사랑 때문이었다면

그것은 무죄

 

사랑이 익어

돋았던 가시 접고

주렁주렁 매단 꽃가루마다

눈물 가득 가두었다가

왈칵 쏟아내고 있는

오월 로비니아 쉐도우 아카시아

정갈한 고백이 넘치는

사랑, 그것은 무죄   

 

 

♧ 허기재의 봄 - 박은우

 

  찰그랑찰그랑 소리에 발맞춰 굽이길 달려가는 소년, 허리에 동여맨 빈 양은도시락은 돌무더기 웅성한 허기재가 아득하다. 사월의 뽀오얀 하루를 갈무리 하는 시간, 감투바위에 구름 한 잎 걸어놓고 단내 나는 숨을 내려놓는다. 비탈 중간쯤의 할매바위에 벌렁 누우면 회색 바위옷에서 할머니 냄새가 난다. 거친 손바닥으로 등을 쓸어주시며 듬성듬성 이가 빠진, 나라 셋을 헤쳐온 당신의 슬픈 역사를 들려주시던 상할머니, 소죽에 삶은 고구마 냄새 같은 가난을 장다리꽃처럼 피워놓고 언제나 밥 한 술 내 밥그릇에 덜어내시던 상할머니의 슬픈 냄새가 난다. 하늘님만 먹을 수 있는 쌀밥 한 그릇 고이 받쳐 든 이팝꽃의 그 무심한 사월, 허기재를 넘자면 한 다발의 진달래꽃을 따먹고 한 움큼의 찔레순을 꺾어먹어야 했다. 빈 도시락에 할머니를 위한 연한 찔레순 한 움큼 마저 채우고 잿마루에 오르면 저녁연기 피어오르는 우리 동네, 노을빛 가난이 참 다정하다. 툇마루에서 지는 해를 붙들고 계실 상할머니를 생각하며 내달리는 기쁨. 내리막길에 무우방귀 돌돌 굴리며 천국을 향해 질주한다. 거기 이빨 없는 늙은 천사의 환한 웃음이 흐트러지고  

 

 

♧ 소리의 범주(範疇) - 유진

 

소리에도 암수가 있어

가죽은 양, 쇠는 음

일식(日蝕)에는 입고 북을 두드리고,

월식(月蝕)에는 징을 쳤다

 

영천(靈泉)의 물을 마신 오색찬란한 깃털

한번 펼친 날개로 구만리를 난다는

봉(鳳)은 수컷, 황(凰)은 암컷

오동나무 그늘에 상상속의 전설을 펼치면

오른쪽으로 6려, 왼쪽으로 6율

우렁찬 오음(五音)은

상서로운 열두 빛깔소리로 울었다

 

소리에도 암수가 있어

날숨과 들숨 사이 사람들이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 다섯 범주

오온(五蘊) 속에 살고지고

 

말을 지운 소리에도 암수가 있어

텅 빈 울림에까지 파문을 그리는

번뇌의 진동 속에 살고지고

 

봉황의 암수 우는 소리에

태양(太陽)과 태음(太陰)을 새긴 사람들이

전설처럼 살다 죽었다  

 

 

♧ 노인(老人) - 임채우

 

재래시장 입구에서 그를 보았다

지난 가을 찬바람 불 때쯤 모습이 보이지 않더니

봄 지나 초여름이 되어서야 바깥나들이다

볼오물이 한 길이고 눈자위는 홉들이

깡말라 꾸부정하다

헐렁한 바지에 늘어진 낡은 잠바

손자 것인 듯 힙합모자 삐딱하게 눌러쓰고

천근 발걸음 뗄 때마다

지구 축이 기우뚱 기운다

겁먹은 눈이 나와 마주치는 순간

이 비루먹은 생이 장난처럼 붙었다 떨어지는 순간

사지 멀쩡한 내가 그를 바라본다

세상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빌어먹을, 힙합모자 삐딱하게 지나간다  

 

 

♧ 어처구니* - 마경덕

 

나무와 돌이 한 몸이 되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일.

 

근본이 다르고

핏줄도 다른데 눈 맞추고

살을 섞는다는 것

아무래도 어처구니없는 일

 

한 곳에 붙어살며 귀가 트였는지,

 

벽창호 같은 맷돌

어처구니 따라

동그라미를 그리며 순하게 돌아간다

 

한 줌 저 나무

고집 센 맷돌을 한 손으로 부리다니

참 어처구니없는 일

 

---

* 맷돌의 나무 손잡이  

 

 

♧ 강물이 발목을 묶다 - 김춘

 

강은 귀를 열어 놓는다. 귓속에서 풀려나오는 소리들을

건져 올리던 부리가 긴 새, 강물에 발목이 걸린다.

새들은 묵음지대의 틈새를 안다. 강물과 강물 사이로

발목을 뺄 줄도 안다. 그러나 가끔은 아주 가끔은

화인을 지닌 강물이 돌아설 때가 있다.

그 순간 익사한 소리가 강물 틈새로 떠오른다.

며칠 전 스스로 강물에 발목을 묶은 부리 긴 수컷도

강물 틈새로 떠올랐다. 화들짝 솟아오르는 암컷,

허공을 찍는 순간 발톱이 한낮을 찢는다.

쏟아지는 해의 파편, 강은 수많은 파편에 찔리고도

조용히 귀를 닫고 흘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