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경업 '가을비'와 수월봉 주변
♧ 가을비
1
온다는 소식 듣고
오후 내내 설레었어요
왜 이리 눈물이 솟을까요
제 어깨를 감싸 주세요
아무 말씀 않으셔도 좋아요
우리 어디든 걸어가요
노각나무 잎 지는 쑥밭재를 넘어도 좋고
유평리 주막거리라도 좋아요
오늘은 바들바들 떨면서
당신의 체온으로 흠뻑 젖고 싶어요
제가 바라는 건 그것뿐이에요. 죄송해요
드리려던 안개꽃이 다 시들었어요
2
장당골, 가느다란 가을비
잠깐이지만
속속들이 깊게 젖는
그 가을, 소리 없이
앙가슴 적시고 간 눈물 같기에
가을비는 오래도록 마르지 않습니다
3
잠시 잠깐이지만
써늘히 스쳐간 그대로 하여
새재 아래 빈 집터
억센 밤송이 가슴을 열고
떫던 땡감이, 발갛게
속을 물들입니다
4
취밭목 가는 길 세재 오름길에서는
그 무엇 그 누구도
우산을 쓰지 않습니다
왜냐구요?
쉬 마르지 않아
젖어 시린 가슴 앓는다 해도
마른 가슴 적시려는
저 여린 것들의 하소연을, 굳이
듣지 않겠다며 우산으로 가리겠습니까
5
치밭목 자작숲처럼, 훌훌
가진 것 다 털어버리고
빈 몸으로 맞이하고 싶습니다
가슴 젖어, 묵었던 해소기침
도지더라도
6
만나고 오는 날은, 서늘하여
가슴에 모닥불이 지펴집니다
매운 연기에 가끔 눈물도 지우며
7
세상의 번잡한 길목에서도
외롭고 쓸쓸함을 아는 이들이여
이 가을에는, 취밭목
비 그친 어스름의 하산(下山)길 같은, 쓸쓸함을
모르는 이들을 위로하자
흥건히 젖고서도 떨지 않는
아스팔트 같은 굳은 가슴들을 위로하자
삶이, 아무리 탄탄하고 야물더라도
때론 쓸쓸함과 외로움도 알아야 하느니
8
비딱하게 빗금으로 내리지 않습니다
거칠게 쓸고 가거나
우악스럽게 퍼붓지 않으며
비겁하지 않습니다
야위어 가는, 비탈의 뭇 생명들에게
촉촉이 목마름을 덜어주는 소임(所任)을 다할 뿐
가을비에 젖는 것은 옷이 아니라
마른 영혼입니다. 예전,
거친 내 영혼 아기단풍처럼 물들이던
누군가의 눈물 같기에
가을비는 오래도록 시립니다
시린 가을 비가(悲歌).
그래서 가을비는 슬픕니다
철없는 날의 발길을 몸추어 섰을
전주일지, 혹 대전일지 알 수 없는
먼 도시의 어느 낡은 골목에서
이제는 초라한 중년이 되어
쉬 알아볼 수 없을 그 누군가를 생각하면
오늘 하루만이라도 저 여린 가을비와 함께
나는 끝없이 슬퍼지고 싶습니다
아! 가을비에 젖는 것은 몸이 아니라
가여운 그 영혼으로 하여, 지금껏 마른
내 영혼입니다
9
발소리도 가만히 오시는 날은
함께 걷는 것 그리 좋아해
오솔길은, 어슬렁어슬렁
바쁠 것 없이
갈참나무 사이로 자작 숲으로
장당골 개울 건너 잡목 숲으로
짐짓 질러갈 곳도 에돌아
이리저리, 저물녘까지
가냘픈 몸매를 같이합니다
10
별들도 하루쯤 쉬어야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