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향기

권경업 '가을비'와 수월봉 주변

김창집 2012. 9. 6. 08:04

 

가을비

 

 

1

 

온다는 소식 듣고

오후 내내 설레었어요

 

왜 이리 눈물이 솟을까요

제 어깨를 감싸 주세요

 

아무 말씀 않으셔도 좋아요

우리 어디든 걸어가요

 

노각나무 잎 지는 쑥밭재를 넘어도 좋고

유평리 주막거리라도 좋아요

 

오늘은 바들바들 떨면서

당신의 체온으로 흠뻑 젖고 싶어요

 

제가 바라는 건 그것뿐이에요. 죄송해요

드리려던 안개꽃이 다 시들었어요  

 

 

2

 

장당골, 가느다란 가을비

잠깐이지만

속속들이 깊게 젖는

그 가을, 소리 없이

앙가슴 적시고 간 눈물 같기에

가을비는 오래도록 마르지 않습니다  

 

    

 

3

 

잠시 잠깐이지만

써늘히 스쳐간 그대로 하여

 

새재 아래 빈 집터

억센 밤송이 가슴을 열고

 

떫던 땡감이, 발갛게

속을 물들입니다  

 

 

4

 

취밭목 가는 길 세재 오름길에서는

그 무엇 그 누구도

우산을 쓰지 않습니다

 

왜냐구요?

 

쉬 마르지 않아

젖어 시린 가슴 앓는다 해도

마른 가슴 적시려는

저 여린 것들의 하소연을, 굳이

듣지 않겠다며 우산으로 가리겠습니까  

 

 

5

 

치밭목 자작숲처럼, 훌훌

가진 것 다 털어버리고

빈 몸으로 맞이하고 싶습니다

가슴 젖어, 묵었던 해소기침

도지더라도  

 

 

6

 

만나고 오는 날은, 서늘하여

가슴에 모닥불이 지펴집니다

 

매운 연기에 가끔 눈물도 지우며  

 

 

7

 

세상의 번잡한 길목에서도

외롭고 쓸쓸함을 아는 이들이여

 

이 가을에는, 취밭목

비 그친 어스름의 하산(下山)길 같은, 쓸쓸함을

모르는 이들을 위로하자

 

흥건히 젖고서도 떨지 않는

아스팔트 같은 굳은 가슴들을 위로하자

삶이, 아무리 탄탄하고 야물더라도

때론 쓸쓸함과 외로움도 알아야 하느니  

 

 

8

 

비딱하게 빗금으로 내리지 않습니다

거칠게 쓸고 가거나

우악스럽게 퍼붓지 않으며

비겁하지 않습니다

야위어 가는, 비탈의 뭇 생명들에게

촉촉이 목마름을 덜어주는 소임(所任)을 다할 뿐

 

가을비에 젖는 것은 옷이 아니라

마른 영혼입니다. 예전,

거친 내 영혼 아기단풍처럼 물들이던

누군가의 눈물 같기에

가을비는 오래도록 시립니다

시린 가을 비가(悲歌).

 

그래서 가을비는 슬픕니다

철없는 날의 발길을 몸추어 섰을

전주일지, 혹 대전일지 알 수 없는

먼 도시의 어느 낡은 골목에서

이제는 초라한 중년이 되어

쉬 알아볼 수 없을 그 누군가를 생각하면

오늘 하루만이라도 저 여린 가을비와 함께

나는 끝없이 슬퍼지고 싶습니다

 

아! 가을비에 젖는 것은 몸이 아니라

가여운 그 영혼으로 하여, 지금껏 마른

내 영혼입니다  

 

 

9

 

발소리도 가만히 오시는 날은

함께 걷는 것 그리 좋아해

오솔길은, 어슬렁어슬렁

바쁠 것 없이

 

갈참나무 사이로 자작 숲으로

장당골 개울 건너 잡목 숲으로

짐짓 질러갈 곳도 에돌아

이리저리, 저물녘까지

가냘픈 몸매를 같이합니다

 

 

10

 

별들도 하루쯤 쉬어야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