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경업의 가을시편과 하늘
아침에 창문 밖으로 비치는
아침 구름이 너무 고와
원고를 쓰다 말고
오름 사진이나 몇 컷 건질까 하여
슬리퍼 차림으로 차를 몰았다.
그러나 해는 벌써 많이 떠올라 있어
오름 사진은 별로 건지지 못하고
들꽃 몇 송이 찍고 왔다.
아침에 찍은 구름 하늘 사진 몇 컷과
권경업 시인이 보내온 시집
‘뜨거운 것은 다 바람이 되었다’에서
가을 시편 몇 수를 같이 싣는다.
♧ 가을에는
바라볼 이 흔치 않는
세월의 모퉁이, 그저
빗나가는 화살의 과녁처럼
가슴 아리한 적신호
야윈 가지 끝 가득 매달고
밤새워 서리 맞은 시린 발로
새재 아래 빈 집터의
감나무 한그루로 서 있겠습니다
그러다가, 그러다가
밝혔던 등불 다 사그라뜨린
앙상한 몸으로
하얀 겨울을 맞는다 하드라도
♧ 가을 섬진강
지친 여정(旅情)에도, 단풍빛
꽃물처럼 휘감은 화개천을 만나, 밤새
몸 섞어 뒤척이며 하나 된 물길 5백리
인정스러운 마을만 휘돌아온 잔잔한 미소만 있습니다
떨던 피아골 골 깊은 두려움은 없습니다, 이제
지리산 마루 하늘의 모습으로
벌건 황톳물 갈앉혀, 아래로 아래로
정성스레 키워낸 재첩 알들로, 언제나
남도(南道)의 정 뽀얗게 나누려는
광양 억양의 하동사람과
하동 말투의 광양 사람만 있습니다
앞앞이 말 못한 쓰린 속은 없습니다
형제봉 마루 매일 밤하늘 이울 때
새벽강물 긷던 손으로 소리쳐, 건너편
친정 아비의 안부를 묻던 백발이 되었을 악양 새댁과
아랫도리 벗어 머리에 이고, 둥둥
허기진 한낮을 맨살로 건너
다압(多鴨) 외가(外家)로 가던 작인(作人)의 어린 놈들
아마 반백(半白)의 추억에 잠기게 할
저무는 가을강만 있습니다, 금빛 모래톱
배고파 따라오던 서러운 발자국은 없습니다
가물어 마른 몸에
품기에도 버거운 왕시루봉과 백운산이지만
회남재 넘어 쫒던 이, 쫒기던 이, 다를 것 없이
속으로, 속으로만 골골거리며 삭히던
아픔도 분노도 백골처럼 다 사그라졌다며
이제는 그냥가자, 바다로 가자고
뱃살에 기름 올라 펄떡이는 전어(錢魚)떼
남은 이빨 몇 없어도 고소할, 바다로 가자고
말없이 소매를 잡아끌며, 쉬엄쉬엄
굽돌아 흐르는 가을, 늙은 섬진강만 있습니다
♧ 가을 산행
세상살이 마흔이 넘으면
가끔 까닭 없이 울고 싶을 때가 있다
떠나는 가을 앞에서는 더욱
예전에는 그저 그려러니 했는데
고추잠자리 한둘씩 사라지고
모두 제 갈 길 바삐 가버리면
왠지 모를 설움은
그냥 그러려니 서 있을 수 없게 한다
여름날의 땀방울 거두어 간
빈 들녘의 언저리
흔들리는 계절의 창백한 억새밭에서
자꾸 빨리 떠나라며 보채는 바람에
나는 등 떠밀리며 실컷 울고 있었다
♧ 가을바람
얼마나 많은 사연이기에
등 굽은 느릅나무 한 그루
우수수, 바람 편에 제 잎
저리도 띄워 보낼까
보시오, 누군들 저 나이라면
삶의 구비구비 두고온 사연
구구절절 털어놓고 싶지 않겠소
하물며 다시 봄날로 간다는 바람 앞에
가시다가 부디 내 젊은 날 만나거든
저무는 산자락,
희끗희끗 회한(悔恨)의 머리 저어
오늘은 통음(痛飮)에 젖더라 전해주오
아직도 사랑한다 전해주오
♧ 늦가을 그리고 아침 산행
안개 피는 새벽이 오면
계곡으로 스며드는 맑은 잔별들
별을 쫓던 바람은 끝내 길을 잃고
하얀 억새꽃 꿈처럼 날리운다
그 꿈 따라 나서는 아침산행
햇살이 자꾸 정겨워지고
♧ 가을 소리 주우러 가자
저무는 무제치기 올라 등짝에 더운 김 솟을 때면
배낭 벗어 등 기대어
담배 한 대 피우고 싶은 언덕이 있다
중봉 비알 늦은 등산객 부지런히 길 잡으며 부르는,
세월의 저편에 두고 온 내 목소리인 듯한 메아리
간혹 조개골 솔바람에 후두둑 여문 도토리 떨어지는 곳
쉰 목청 추스리는 안쓰런 귀뚜리
바라지 안 석유등 도란거리는 작은 산장
저녁 끝낸 침상머리에선 막 얼굴 익힌 서넛 산꾼들
아랫녘 인심에 다리품 곁들인 술잔 건네받으며
술기 오른 목청 절로 산노래 흥얼거려지는 곳
그러다 호젓이 밤은 깊어
써레봉을 내려와 뒤란 샘텃가를 맴도는 부엉이 울음
침상 윗칸 작은 창 쪼르르 몰려드는 별빛
뜨락에 떨어진 꼬리별들 조잘대며
모로 눕힌, 침낭 속 꿈결까지 따라오는 곳
시월이 다 가기 전에, 우리
별 구르는 가울 소리 주우러 치밭목에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