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정의 시와 ‘방울꽃’
김희정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아들아, 딸아 아빠는 말이야’를 보내왔다.
얼마 전 상가에서 만나
막걸리 한 잔 했는데--.
한국작가회의 소속인 김희정 시인은
전남 무안 출생으로 대전에 살고 있으며,
2002년 충청일보 신춘문예, 2003년 ‘시와 정신’으로 등단
시집으로 ‘백년이 지나도 소리는 여전하다’,
‘아고라’ 등을 냈다.
♧ 시인의 말
세 번째 집을 지어 세상에 내놓는다. 이 집이 누군가의 안식처가 될 수 있을까. 첫 번째 두 번째 집은 이름 없는 문패 때문인지 모난 집 때문인지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방에 벽지도 바르고, 술 한 잔 할 수 있는 공간도 만들고, 차 한 잔 나눌 수 있는 마루도 만들었다고 생각했는데 내 착각이었다.
아무도 찾지 않는 집에서 꽃향기를 기다리고 햇볕을 기다리고 길 잃은 낙엽을 기다리며 혼자서 부산한 시간을 보냈다.
못난 목수 탓이다.
2012년 여름날 한밭에서
김희정
♧ 안개나무
외롭고 쓸쓸하면 안개나무를 만나러 가라 안개가 내리면 하얀 어둠 속에 당신을 맡겨봐 그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 얼마나 멀리 가 있는지 숲의 정령들은 알고 있다
당신이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면 도시에 불청객처럼 내리는 안개야 상처에 스며들어 덧내고 후비며 심지어 개인들의 불행을 즐기기도 하지 김 씨가 가짜 안개에 당했다는 소식은 소문이 아닌 사실이야 그는 아직도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안개나무는 알고 있어 그의 불행은 인공 안개가 만든 슬픔이라는 것을
새벽 강에 서면 누군가 울고 있는 것을 들을 수 있다 슬피 우는 모습은 자식을 잃은 어미도 아니요, 어미를 잃고 상처까지 덧난 어린 짐승은 더욱 아니다 그들이 울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당신이 잘못 보았거나 당신의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있거나 그것도 아니면 남의 불행에 대해 그 동안 무관심해서다 잠시 마음을 열고 들어보면 안개나무가 울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거야
안개나무가 강이나 바다 숲에서 자라는 것은 당신의 슬픔이 태어나기 전인지도 모르겠다 기억에 없는 시간, 안개가 세상에 씨앗을 뿌려 뿌리를 내렸다면 그것은 당신을 품기 위해서일 거야 가끔 인공 안개가 우리의 눈시울을 붉히게 하지만 그 슬픔을 유지하기 위해 인공 눈물이 필요하다는 것을 안개나무는 알고 있어
바람이 불어도 낙엽을 떨어뜨리지 않는 안개나무, 지상이 슬픔으로 만개하면 어느 바다나 강이나 산이나 들에서 수많은 낙엽을 는개처럼 뿌려놓는다
♧ 붉은, 시월
길 잃은 단풍들
시월의 숲을 보았는가 백 년 전 외쳤던 그 목소리가 메아리로 산다 숲길은 삭정이만 남아 더 이상 푸른 잎을 잉태하지 못했다 시베리아 기단을 등지고 남하하는 가지 사이로 나부끼는 붉은 깃발들 소멸과 싸우는 시간을 알리려 봉홧불처럼 산봉우리를 태운다
나무에 매달린 늙은 잎들, 꿈의 애착에 파르르 떤다 투쟁을 연상시키는 바람의 출정기는 잎들을 매장한다 탈색된 수많은 혁명가들 하얗게 질려 각혈을 하다 나무 품으로 돌아간다 혁명을 좇다 산산이 부서진 잎들 저 잎들이 봄의 새싹으로 태어나기까지 나무는 추운 겨울을 보내야 한다
혁명은 늘 한 발짝 늦게 숲에 온다, 그래서 나무가 춥다
♧ 옥상
주어진 하루가 는개처럼 내리면 저장되어 있는 메모리칩을 들고 올라간다 내게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시간을 먼 혹성으로 전송한다 옥상은 좀 더 높은 곳에서 나의 과거와 교신하기 위해 만들어진 송신탑이다 타다 남은 담뱃재처럼 바람 앞에서 서 있는 마음을 열어 미래의 나를 만나는 접선 장소이기도 하다
머리에 난 더듬이처럼 안테나를 세운 가장들이 자정을 넘기면 하나 둘 옥상으로 모여든다 어느 별에 있는 또 다른 자신에게 발신을 시작하면 뚜르르 뚜르르 되어간다 선율이 흐르고 사연과 사연이 만나 관객도 없는 음악회가 열린다
협연이 끝나고 한 방울의 눈물이 이슬로 맺힐 때 옥상은 비로소 아침을 맞이한다
♧ 계절마다 환자였다
봄마다 신열이 꽃으로 피었네 살이 툭 터지면 새싹이 올라오고 꽃봉오리가 맺히기도 전에 목이 잘리는 꿈을 었지 때로는 바람의 망나니를 만나 형장으로 질질 끌려가는 나를 보고 살려달라고 애원도 해보았네 계절은 그 때마다 나를 죄인 취급했지
녹음이 우거지자 숲은 푸른 수액을 모았지 목이 마른 나는 매미처럼 나무에 붙어 맴맴 도시를 향해 외쳤어 병원비를 벌겠다고 떠난 누이를 부르다 자지러지곤 했지 콘크리트 벽에 목소리가 잘려나가는 순간 허물만 남은 나의 육신
가을 산에는 낙엽들이 울었고 엄마도 그랬다 마지막 잎을 떨구고 혼자만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나무처럼 바람에 나를 던져놓았다 자식을 버린 나무를 보자 내 몸에서 소름이 돋듯 톱날이 튀어나와 쉴 새 없이 가을을 잘라냈다
몸에서 기다림이 벌목 되어 나가고, 겨울 아궁이에 던져진 열병은 서쪽 하늘을 물들여 놓았지 노을 앞에서 새싹의 기억은 낯선 계절병으로 다시 태어나 자꾸 굴뚝으로 파고들고
푸른 살이 고사목처럼 메마르자 고로쇠나무를 찾아 수백 개의 바늘을 꽂아 내 혈관으로 수액을 끌어들여보지만 병증은 계절만큼 깊어만 갔지
♧ 보물상자
옛 기억은 잠에 빠져있다
마음 속 깊이 묻어 둔 상자 안에서 기억의 풀들은 사라진다 오래 슬라이드처럼 스쳐간 생채기 그 날것들은 세월을 피해 누워있다 잠에서 덜 깬 추억들은 서로 몸을 부비며 의지한다 배슬배슬 나를 바라보는 저 잡것들, 미처 챙기지 못해 서운하게 생각했을 사연도 안녕했다 몇은 옛 모습을 뒤로 하고 풍화의 길에 접어들고 두엄 속 곰삭은 홍어처럼 톡톡 쏘는 맛을 내며 거울 속에 그녀를 잡놈처럼 사랑했던 마음, 아직 기다리고 있다
지울 수 없어 기억의 상자에 던져 놓았던 시간 몸은 훌쩍 커버렸는데 마음은 여전히 아무것도 담을 수 없는 사기그릇이다 애써 잊어버리고 싶었던 그녀 그 세월의 그루터기를 끝내 넘지 못했다 어릴 적 없었던 겨드랑이 털이 천사의 날개깃으로 착각했던 것일까 보석으로 변했을 거라는 로망은 상자를 열게 한 자객이 분명하다
한 그루 기억의 나무로 성장해 초원에 그늘을 만드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 기다려야 할까
♧ 다림질
아내가 옷을 다림질 하면서
주름이 잘 펴졌으면 좋겠다고 중얼거린다
그 옷을 입고
세상 이곳저곳 기웃거리다보면
수많은 갈랫길이 만들어진다
옷에 난 구불구불한 길을 보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아내는 그런 내 마음을
눈치라도 챘다는 듯
집으로 돌아올 수 있는 길을
직항로처럼 표시해 준다
세상에 나가
함께 걸을 수 있는 길,
만들면 좋겠지만
가끔 만들지 말아야 할 길을 만들어
집으로 돌아오면
옷에 길들이 실타래처럼 뒤엉켜 있다
그때마다 아내는 흔적을 지우려고
다림질에 정성을 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