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카 일기

금강아지풀, 추분에

김창집 2012. 9. 22. 00:20

 

태풍을 몇 번 보내니

어느덧 추분이다.

밤과 낮의 길이가 같아진다는 절기,

추분의 들녘에는 곡식들 빛이 누렇게 변해가고

벼와 조가 더욱 더 고개를 숙인다.

머잖아 황금빛 벌판이 우리를 맞으리니….

 

금강아지풀은 볏과에 속한 한해살이풀로

높이 20~50cm로, 대는 가늘고 길며 뭉쳐나고,

잎은 좁고 길다. 꽃은 8월에 피는데,

통 모양의 꽃이삭은 황금색이다.

구황 식물(救荒植物)로 종자를 식용한다.  

 

 

♧ 언제부터 외로운가 - 박종영

 

꼭 이맘때,

그러니까 처서 물 지나고 백로 절기 지나,

추분이 되면 선선한 초가을 바람으로

먹먹해지는 가슴은 무엇이냐?

앙금 없이 걸러내는 마음 하나 갖고 싶어

이토록 참고 견뎌온 시절인데,

오죽이나 못났으면 그 흔한 쑥부쟁이

한 아름 모두 빼앗기고

슬금슬금 물러나는 꼴이라니,

구차하게 흔들리는 억새꽃 비웃음이

절로 나를 슬프게 한다.

눈치껏 산에 올라 외로움 타는 물푸레나무

알몸 만지는 자유가 있어서 좋고,

옹달샘 가까이 가면 시원한 물 한 모금

누가 먼저 마시고 갔는지 몹시 궁금하다.

산 아래 끝자락,

새로운 시작을 위해 한 폭의 풍경으로 궁구는 낙엽,

그 우직한 생명의 무덤을 쌓고 있는 가을은

언제부터 외로운가?   

 

 

♧ 가을 유혹 - 권오범

 

어정쩡한 보폭의 추분과 한로 사이

노라리 소슬바람 제세상 만나 객기 부리다

탱자나무 가시에 찔렸나보다

탱자가 푸르락누르락 기겁한 걸 보니

 

곁에서 살 떨리는 광경 목격했는지

석류는 피투성이가 되었고

대추도 알라꿍달라꿍

감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생화에 들숨 날숨 없어 퍼석해진 마음

역마살 도지도록

들썽하게 불 질러놓고

하늘은 어찌 저리도 멀쩡한 것이냐

 

자줏빛이던 맥문동 모가지엔 꼬치꼬치

옥구슬 목걸이 걸고 곤댓짓 하지요

코스모스는 시도 때도 없이 는실난실

허술한 감성을 잔인하게 꼬집지요  

 

 

♧ 경전(逕典) - 고재종

 

차랑차랑, 순금 이삭 일렁이는

추분의 들판에 서서

먼 곳으로 고개를 드는 어머니의

수정 눈물은 나의 경전이다

 

지난여름 큰비 큰바람에

죄다 꺾인 닷 마지기 논을

죄다 일으켜 세우고

당신의 허리가 꺾이어선

자리보전하던 어머니를 나는 안다

 

시방 김제 만경 들판에 가보아라

하늘이 어쩌려고

그토록 순금 햇살을 쏟아 붓는지

쏟아 부어선 따글따글 익히는 게

어머니의 수정 눈물은 아닐는지

 

지평선을 바라보지 말자

왕배야덕배야, 내가 가 닿을 곳은

저 논에서 피를 뽑다

피투성이 흙감탱이 몸으로

나를 낳고 낳는 어머니의 환한 품

 

죽어서 하늘로 가지 않고

저 시리게는 신신한 땅에 묻히는

어머니의 수정 눈물이

추호라도 삼가는 나의 경전이다   

 

 

♧ 탄금대 - 운봉 김경렬

 

월악의 눈물 호수 구름 타고

충주호에 추분 빛으로 피고

우륵의 가야금 퉁기는 선율에

백로 날갯짓도 멈추네

배수의 진 탄금대 팔천 눈물

절벽 밑 푸른 내 되어 흐르건만

부대낀 용섬은 홀로 눈물을 지키누나

삼삼오오 몰려든 객꾼들

울부짖는 강물의 진혼곡을 아는가

하늘 푸른 빛 남한강의 눈물

붓 끝을 찍어 한 줄 시를 쓰노라  

 

 

♧ 나는 불 꺼진 숲을 희망이라 말하고 싶다 - 고영

 

추분 지나 급격하게 야위는 가을밤,

실내등 불빛 아래서 『랭보―지옥으로부터의 자유』를 읽다가

랭보의 무덤에 이르러 나는 밑줄을 긋는다

밑줄 아래로 펼쳐진 회화나무 숲에서

자유롭게 비행하는 산비둘기가 보였다

 

잉크로 쓴 내 첫사랑은 유성이 되었다

검정파랑빨강 삼색의 잉크병을 비우면 희망도 상처로 번졌다

책을 떠나서 가벼워진 단어들 문법들 그리고 금방이라도

뾰르릉 날아갈 것 같은 詩語들,

유혹은 놓칠 수 없는 것들만 밤새 끌고 다녔다

 

 

세상이라는 거대한 숲은 마약처럼 위험했다

부도난 어음은 찢겨져 길거리에 뿌려졌다 지갑 속에서

낯선 명함들이 죽어 나가기도 했다 내 연락처엔

야윈 발자국들만 웅성거렸다

바람이 이끄는 길을 밟고 가기도 너무 벅찼다

세상은, 문법이 통하지 않는 미로 같았다

랭보의 무덤을 지나 밑줄도 끝났다

밑줄 너머로 펼쳐진 회화나무 숲에서

아름다운 유성을 품고 있는 산비둘기가 보였다

저토록 눈부신 알을 간직하고 있었기에

산비둘기 날 때마다 숲은 환해졌던 것인가

 

나는 불 꺼진 숲을 이제 희망이라 말하고 싶다  

 

 

♧ 가을에게 보내는 편지 - 반기룡

 

잉걸불 같던 여름 날씨도 서서히 꼬리를 감추고

고추잠자리와 국향으로 가득 메울 가을이

살금살금 입맞춤을 하려고 예행연습을 하는 이때,

발칸반도의 남단에 있는 그리스에선

우리의 심장을 콩닥콩닥하게 하고

밤잠을 설치게 하는 승전보가 들려오곤 하지

그동안 피. 땀. 눈물을 흘린 결과가

메달 색깔을 달리하며 웃게도, 울게도 하는

짜릿한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단다.

 

그런데 일년 동안 아무런 소식 없이 꼭꼭 숨었던 가을, 너는

늘 그랬듯이 금년에도 가을비와 태풍을 동반하여 오고 있구나

(이번엔 메기인데 다음번엔 가물치일까)

이젠 며칠 후면 처서가 오고 좀 있다가 추분이 오겠지

너를 기다리는 분들이 즐비하게 장사진을 치고 있단다.

지금도 시마을엔 네 이름이 간혹 회자되고 있고

세종대왕께서 한글 창제를 한 보람을 느낄 정도로

다양하고 멋있는 시어가 속속 알몸을 드러내고 있지

 

 

그 이름 자주 거론되고

여기저기에 삽입하고 삭제하고 수정하더라도

짜증없는 아름다운 맘 갖기를 바란다.

 

준비된 사수가 목표물을 향하여 방아쇠를 당기듯

얼마 후에 벌겋게 수놓을 그 가을 꽃동산이

눈앞에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그날을 기다리며 지식과 지혜의 완결판이오,

살아있는 대백과사전들의 힘찬 행진을 지켜보렴,

 

그리고

너도 가슴에 품었던 시어들을 몽땅 토악질하여 주기 바라며

일신 일일신 우일신(日新日日新又日新)하는 나날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