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람된 추석을 위하여
‘더도 덜도 말고 추석만 같아라.’라는 말은
아무래도 우리가 굶주림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농자천하지대본 시절에 나온 말 같다.
절대적 빈곤보다 상대적 빈곤 때문에
행복하지 않다는 사람이 많은 작금의 현실에서는
이런 말은 그저 입에 발린 구호에 지나지 않는다.
추수에 대한 감사와 조상에 대한 고마움을 표하는
명절이 즐거웠던 건 어린 시절이고
나이가 든 후엔 어느 해 한 번 경제적으로 풍족하단 말을
들은 적이 없다. 언제나 경제가 어렵고 소외된 사람이
많은 것이 사실인 세상이 돼버린 것이다.
이번 추석만이라도 우리는 이런 소외된 이웃이나
외로운 분들을 찾아보는 데서 위안을 나누는
그런 추석이 되었으면 좋겠다.
달처럼 크진 안지만
소박한 달을 닮은 왕고들빼기 꽃을 올린다.
♧ 추석달 - 정희성
어제는 시래기국에서
달을 건져내며 울었다
밤새 수저로 떠낸 달이
떠내도 떠내도 남아 있다
광한전도 옥토끼도 보이지 않는
수저에 뜬 맹물달
어쩌면 내 생애 같은
국물을 한 숟갈 떠들고
나는 낯선 내 얼굴을 들여다본다
보아도 보아도
숟갈을 든 채 잠든
자식의 얼굴에 달은 보이지 않고
빈 사발에 한 그릇
달이 지고 있다
♧ 가을 산 0번지의 추석 - (宵火)고은영
어둠은 그늘을 지우고 앉았어도 견고하고
언제고 행복을 얘기해 주는 법이 없었다
퍼 석대는 가난의 때가 맞물리던 그 옛날
옥수수 죽이면 탁상이요 시래기 죽도 귀했던
가을 산 0번지엔 가난에 물려 죽은 영혼들이 산다
징그럽게도 허기에 몰린 영혼들이 배고픔을 달래고파
풍성한 가을 추수의 낱알이 마냥 그리운 밤이 되면
쪽방 촌이나 하루의 온기를 그리는 사람의 수만큼
별들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있다
점점 차가 와지는 대지
밤새 별들이 흘린 눈물이 아침엔 이슬이 된다
수수깡처럼 마른 꿈들이 밤사이 창밖을 맴돌다
그리움에 타 죽을 만큼 후줄근해 진 발길로
돌아온 새벽은 살아 온 세월만큼
초라한 형편으로 구겨져 형체 없이 쌓여가는
외로움이 빈들에 홀로선 추석
기다림은 언제고 텅 비어 있다
때로 억척스런 생존의 의미도
하루쯤 벗어 버리고 싶었던 추석엔
누구에게는 기쁨의 시간으로 현존해도
또 다른 누구에게는 막장 같은
쓸쓸함으로 확장되는 아이러니
불평등 증후군들이 저만치 겨울을 바라본다
볼품없는 뱀의 허물처럼
마냥 외로울 수밖에 없는 가난의 멀미가
사지를 조금씩 찢어발기며 고독한 달빛 대신
청승맞은 빗소리로 차오르는 올 추석은
겉보다 속이 더 아픈 저 들판
외로움이 홀로 비에 젖는다
♧ 추석 - 정군수
고향집 우물가에는
지금도 놋대야에 달이 뜨고 있으리
흰 고무신 백설같이 닦아내던 누이
손끝 고운 그리움도 남아 있으리
눈엔 듯 보이는 듯 뒤안을 서성이면
장독대에는 달빛 푸른 새금파리
눈에 비친 어머니 안쓰러움도
오늘밤엔 기다림으로 남아 있으리
굴렁쇠 안에 뜨는 둥근 보름달
고샅길 이슬 맞고 달려 오며는
달빛 받아 피어나는 할아버지의 수염
박꽃 같은 웃음도 남아 있으리
♧ 추석에 - 임종호(山火)
우리 집 뒤뜰에는
대나무 밭이 있고
감나무 두 그루가
우뚝 서 있다
추석을 위하여
아버지와 나는 주황색으로 물든
대접 감과 홍시를 딴다
어머니는 감 우리는데 으뜸 이셨다
딱신한 물에 약간의 소금간을 하고
항아리에 감을 잠기도록 담그고 솔가지와
감잎으로 아궁이를 채운 뒤
항아리를 따뜻한 아랫목에 놓고
이불로 항아리를 감싸서 온기를 보존한다
스물 네 시간 정도 지나면 감은
영롱한 빛을 내며 그대로 우린 감이 된다
그 감을 한입 덥석 물면
아삭, 하면서 한입 떨어져 나오고
씹히는 소리 또한 아삭아삭 한다
단물이 목안으로 흐른다
그 감나무는 아직도 그 자리에 서 있는데
어버이는 가고 아니 계시다
♧ 추석과 어머니 - 박인걸
고향 인정은
밤송이처럼 여물고
어머니 모습은
맨드라미처럼 붉다.
마디 굵은 손으로
솔잎 섞어 빚은 송편
꽃 그릇에 담아
마을에 情을 나를 때면
늘어 선 코스모스
다정하게 손 흔들 때
어둑한 신작로 위로
달이 따라오며 웃었다.
고향 온정이 섞인
불빛 노을이
어머니 추억을 뿌리며
아파트 지붕을 넘고 있다.
♧ 추석 - 반기룡
길가에 풀어 놓은 코스모스
반가이 영접하고
황금물결 일렁이는
가을의 들녘을 바라보며
그리움과 설레임이 밀물처럼 달려오는
시간이었으면 합니다
한동안 뜸했던
친구와 친지, 친척 만나보고
모두가 어우러져 까르르 웃음짓는
희망과 기쁨이 깃발처럼 펄럭이는
날이었으면 합니다
꽉 찬 보름달처럼
풍성하고 넉넉한
인심과 인정이 샘솟아
고향길이 아무리 멀고 힘들지라도
슬며시 옛 추억과 동심을 불러내어
아름다운 상상의 나래를 활짝 펼 수 있는
의미 있고 소중한 추석이었으면 합니다
♧ 추석달을 보며 - 문정희
그대 안에는
아무래도 옛날 우리 어머니가
장독대에 떠놓았던 정한수 속의
그 맑은 신이 살고 있나 보다.
지난여름 모진 홍수와
지난봄의 온갖 가시덤불 속에서도
솔 향내 푸르게 배인 송편으로
떠올랐구나.
사발마다 가득히 채운 향기
손바닥이 닳도록
빌고 또 빌던 말씀
참으로 옥양목같이 희고 맑은
우리들의 살결로 살아났구나.
모든 산맥이 조용히 힘줄을 세우는
오늘은 한가윗날.
헤어져 그리운 얼굴들 곁으로
가을처럼 곱게 다가서고 싶다.
가혹한 짐승의 소리로
녹슨 양철처럼 구겨 버린
북쪽의 달, 남쪽의 달
이제는 제발
크고 둥근 하나로 띄워 놓고
나의 추석달은
백동전같이 눈부신 이마를 번쩍이며
밤 깊도록 그리운 얘기를 나누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