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향기

수크령과 우리詩 10월호의 시

김창집 2012. 10. 13. 00:29

 

시詩는 소중한 삶의 노래이며,

자연의 신비에 대한 찬미이며,

또한 우리가 꿈꾸는 세계에 대한

아름다운 표상이다.

 

시는 인간의 감성과 지성,

예지와 의지가 빚어낸

영롱한 언어의 결정체,

맑은 영혼의 집이다.

 

………

 

윗글은 사단법인 우리詩진흥회의

‘詩의 선언’의 일부이다.

위 모임에서 다달이 내는

 ‘우리詩’ 2012년 10월호(통권 292호)에 실린

시 7편을 골라 함께 수크령 사진을 올린다.

 

수크령은 볏과에 속한 여러해살이풀로

높이는 30~80cm이고, 줄기는 뭉쳐나며,

잎은 빳빳하고 끝이 뾰족하다.

9월에 이삭이 잎 사이에서 나오는데

빛깔은 흑자색이고 가시랭이와 털이 빽빽이 난다.

들이나 양지바른 곳에 저절로 나며

아시아 온대에서 열대까지 널리 분포한다.  

  

 

♧ 마음으로 빚은 빛 - 조경진

 

어느 도공의 마음일까

슬프도록 빛나는 빛의 정화

 

무량의 흑해를 건너온

달빛과

바람소리, 물소리, 고요를 담아

천둥으로 물레를 돌렸을 게다

 

흙이 불을 당겨

다시 태어난 맑은 영혼

 

하루에도 수없이

모란이 피고 천년 학의 날갯짓

오백 년을 넘어 지켜온

그 빛의 상서로움

 

청자를 시리도록 바라보다 눈 감으니

청자가 부처이시다  

 

 

♧ 졸음拙吟 - 조영심

 

흑단의 침대 위

깃털보다 부드러운 보료에 누워

가물거리는 눈으로 잠의 씨앗을 뿌려대는

하오의 신(神) 힙노스(Hypnus)를 보네

 

소리 없는 날갯짓의 단음으로 조율된 주술이

이마를 타고 내려와 눈꺼풀에 닿으면

졸음의 무게를 이길 수 없어

졸음에 빠지네

 

한낮의 빛을 피해 어둠 골짜기

막연한 쳇바퀴를 따라 돌다

돌쩌귀 없는 문 하나를 지나고

잠의 웅덩이에 이르네 작은 죽음의 궁

 

하지만 뭉친 생각들을 풀어

칸칸 활자에 등 기대고 잠시 눈을 붙이면

침묵이 피아노 건반처럼 흘러가네

 

순간마다 반복되는 이 밤낮으로

하나의 꿈과 백 마디 말이 담긴 사원을 짓고

나는 또

어디를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네

    

--- 

* 졸음(拙吟) : 잘 짓지 못한 시  

 

 

♧ 아버지의 품종 - 허연숙

 

수몰의 끝자락에서 매운 농사를 짓던 아버지

독하고 아린 품종을 여전히 경작하고 있다

육쪽마늘 농사 끝이 맵기만 하다고

취한 말들로 중얼거렸지만

육쪽마늘에서 한 쪽 빠지는 오형제들

그 독하고 매운 자식들 어찌 마음에 품고 계셨을까

점점 밭이 되어가는 아버지

마늘쫑 쫑쫑 뽑히는 소리를 무시로 들었던 그 마음 밭

그 밭엔 한 소작농의 큰 농법이 자라고 있다

 

매운 품종은 매운맛에 승부를 건다

힘들수록 코끝을 쏘는 다섯 쪽의 마늘들

수몰 앞에서 끝까지 지키려 했던

그 마늘 밭은 이제 물무늬가 자란다

때가 되면 그 귀퉁이에 아버지를 심을 것이고

마늘들이 경작을 서두를 것이다

 

가슴의 고랑마다 푸르게 여물고 있는 검은 흙 밭

죽어라고 쫓아다니던 한낮 햇볕이 멀리 밭을 떠나는 시간

아버지의 잠에서는 아직도 물비린내가 난다

세상에서 혹독한 장마와 가뭄을 지나 온 밭

그러나 가장 기름진 밭이 아버지 마음속에 있고

우리는 모두 그 농법의 품종들이다   

 

 

♧ 바람잡이 - 우기수

 

한 뼘 남짓

가슴팍 감싸기엔

반 자 모자란 그리움

 

세상은 넓다

풀풀 뛰던 아이는

간데없고

고목나무 껍데기 같은

중늙은이가

시시덕거리며 서있다

 

바람에 잡혔나

바람에 매였나

손끝에 잡힌 세월

헛손사래에 묶어놓고

 

어디가

처음이고 매듭의 끝인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회돌이

그저 쉰 소리 내는

휘파람 소리  

 

 

♧ 립스틱 뻐꾸기 - 조삼현

 

1.

 

산그늘 드리운 숲에서 뻐꾸기가 운다 뻐꾸기 울음소리는 벗꼬, 벗꼬, 벗꼬… 너 이승의 짐 돌멩이 얼마나 무거우면 그리 벗고, 벗고, 벗겠다 몸부림이냐 뻐꾸기 울음소리는 붉기만 하여 돌이킬 수 없는 마음처럼 멀기만 하여 가까운 곳도 늘 그만큼의 거리에서 아스라이 들린다 남의 둥지에 알을 낳은 업보가 그러하여 계모 품의 새끼 핏덩어리 새끼 차마 다가서지 못하고 이 나무 저 가지 팥배나무 그늘에 숨어 발가락이 새붉게 그리 슬피 우는 것이냐 뻐꾸기 울음소리는 벗꼬, 벗꼬, 벗꼬… 날이 저물도록 좀체 그치지 않았다.

  

 

 

2.

 

  낮은 산자락을 낀 소도시 변두리. 각시붓꽃 접시꽃 도란도란 핀 천사원 놀이터에 손톱에 봉숭아 꽃물들인 아이들이 재재거리며 뛰어 논다 시소를 타다 흙에 뒹굴다 모래를 뿌리다 놀다 웃다 울다 웃다 함부로 논다 골절상을 입었는지 한 아이 깁스를 하고 팔걸이를 맸다 부러진 팔보다 사라진 핏줄이 아픈지 햇무리처럼 낯꽃 젖어있다. 담장 뒤 굴참나무 숲에 뻐꾸기 한 마리 숨어 지켜보며, 입을 틀어막고 지켜보며 날이 저물도록 슬피 울고 있었다. 립스틱 붉은 뻐꾸기였다.  

 

 

♧ 똥장군 - 김용길

 

고구마도 길러내고

감자도 길러내고

허기진 배를 달래주며 나를 길러내고

 

그래서 그걸 아버지는 떡 주무르듯 하셨나 보다

 

딱지 치거나 자치기하며 놀다가도

집으로 달려와 일을 보곤 했다

똥이 음식이 되는 시절이었다

 

밭으로 논으로

쭐렁쭐렁 지고 가던

아버지의 똥장군 지게

 

헛간에서 저 혼자 늙어가며 추억을 길러내고 있다  

 

 

♧ 수리공과 장미 - 정운희

 

초대의 형식은 아니지만

실내는 한껏 부풀어 있다

 

모퉁이에서 맞닥트린 사람처럼

우리는 서로를 모른 채 즐겁다

 

이름도 모르는 사람을 방에 들여 놓고

신발을 정리하고 거울을 닦는다

장미는 어제보다 조금 더 향기롭다

향기가 때론 무기 같아서 팽팽해진다

 

사내의 손끝에서 한낮이 풀어진다

만남은 오래된 커피와 같아서

쓴맛의 어원을 잊은 지 오래

퇴화된 혀끝

달거나 쓴 촉감을 모르겠다

 

커튼은 나비처럼 고요하고

테이블은 단단히 묶여있다

선뜻 들어설 수도 없는

사내의 등 뒤

숨 쉬는 찻잔이 내손 안에 있다

 

나사들은 천천히 움직이고

우린 같은 내용으로 집중한다

 

볼트와 너트를 풀어내고 조이고

나는 과일을 꽃처럼 깎다가

허공에 손을 씻다가 말리다가

발을 오므리다가 펴다가

 

볼트와 너트가 정리되자

수 만 송이의 장미꽃이 모니터 속에서 넘쳐난다

 

흔들리는 벽 흔들리는 전등 흔들리는 오렌지…

흔들리던 공구 통이 사내를 질질 끌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