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에 흐르는 가을의 詩
♧ 초대의 말
계절의 한복판을 가을이 가로질러 바삐 걷고 있습니다.
지난여름의 뜨거운 폭염과
몇 차례 태풍이 남긴 상흔을 이겨내고
이렇게 또 가을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바람 좋은 이 저녁에 그렇게 지나간 시간을 잠시 돌이켜봅니다.
모든 희망의 싹은 절망의 끝에서 움튼다는 사실
그래서 가을은
꽃이 지고, 낙엽이 떨어지는 쓸슬한 풍경 속에서도
그리운 이들, 사랑하는 사람들의 존재감이
더 따스하게 다가오는 계절이기도 하다는 것을.
제주작가회의가 매년 정성껏 준비하여,
시민들과 만나는 본 행사도 어느덧 10여년이 훌쩍 지났습니다.
작년에 이어 다시, 산지천 광장에서 마련된 무대에서
여러분과 만나게 되니 반갑고 기쁜 생각이 가득 차오릅니다.
잠시 분주한 삶의 무거움을 내려놓고
몇 편의 시들과, 그 시로 만들어진 노래들을 감상하시면서
깊어가는 가을밤의 서정을 함께 즐겨주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2012. 10. 20.
한국작가회의 제주도지회장 김창집
* 참취
♧ 의자 - 이정록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라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 의자 - 이지엽
시 쓰는 놈이 왜 그걸
딱딱하다고만 생각하냐
머시냐 거 꽃게 속 연한 속살 있냐 안
그렇게 부드럽단마다
밥이 곧 의자 아니든?
어디 뛰다닌다고
다 시가 되드냐
시 쓰는 것 결국에는 엉덩이 아니더냐
지그시 눌러 앉아서
지우고 또 묵히고
니 애비도 속창시 읎이
하라는 농사는 않고
탁배기에 막걸리 한 잔, 소리도 잘했어야
이제사 생각해보니
그것도 의자였어야
엉거주춤 섰지만 말고
거기 풀썩 앉어봐라
아무리 힘준다고 고것 꼼짝이나 하든?
죽으믄 다 소용 읎어야
그 자리가 꽃자리여야
♧ 가을 이야기 - 양전형
1
가진 것 탈탈 다 털어 내는
은행나무
버려진 것들은 바람 몫이다
바람이 비틀비틀 굴리며 간다
맞다 맞다
가을은
떨어져 내려와서 구르며 가는 것
2
가을은
혼자서 왔다가 혼자 가는 것
포르르 떨며
내 안에 단풍들 내려 쌓인다
홀로 내게 들어와
낙엽을 바삭바삭 밟고 있는 누구여,
이제는
바람을 휘휘 감아 넣겠으니
어깨를 움츠리고 옷깃을 세우시라
3
아니다 아니다
가을은
오는 게 아니라 가기만 하는 것
우리가 그냥 흘러만 가듯
한낮
방구석에 들앉아
또르르 또르르
가을이 잰걸음으로 흘러가는 소리인 줄 모르고
가을이 왔다고만 박박 우기는
저 귀뚜라미
4
가을은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아
다만,
내 마음이 붉어지고 있어
어쩌면 가지고 있는 걸 다 놓아버릴지 몰라 라는 말
가을은
떠난다고 하지 않아
깃 속으로 깊숙이 고개 숙인 채
뒤돌아보지 않고
작은 공원 속으로 천천히 사라질 뿐
그리고 가을은
다시 만나자는 말을 하지 않아
♧ 베릿내의 숨비기꽃 - 정군칠
물총새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는다.
베릿내에는
고향 뜨며 거둘 새 없던 숨비기꽃 겨우 몇 포기
바다마을을 지킨다.
이 척박한 바위틈에 어머니의 숨비 소리꽃으로 타올라 있다.
제기랄.
지금은 어머니 산소 다녀오는 길
어깨 늘어진 숨비기꽃도 함께 다녀오는 길
봉분의 흙 한줌 가져와 꽃부리 덮어주면
어느새 내 등에 얹혀오는 따뜻한 손이 있다.
사라호 태풍이 일던 아침 물이 불어나고
내를 거슬러 오르던 은어떼들로
갈대들의 사타구니는 오싹오싹 긴장을 하고
마을을 에워싼 숨비기꽃은 바람을
잘도 막아 주었다.
다시 태풍이 불었다.
그 이름 없는 태풍에는 희한하게도 물이 줄어들었다.
은어 떼는 흙탕물에 방향을 잃고
갈대들은 몸 추스릴 새도 없이 흙더미에 묻히고
숨비기꽃은 이파리 찢기며 나팔을 불어댔지만
자갈을 퍼 올리는 중장비의 굉음에 묻히고 말았다.
바삐 도망치는 게 한 마리
게 한 마리처럼 집을 빠져 나오는 사람들을 보며
그게 칭원하여 바다는 거품을 물었다.
아득도 하여라
강산은 일 년만에도 변하여 그 일 년이 스무 번을 넘겼고
누이의 젖살 같은 베릿내에는
방황의 냇둑을 굽이 안고 돌아
숨비기꽃의 낭자한 상처를 아물리고 있다.
♧ 신촌 가는 옛길 - 현택훈
도비상귀도 지나간 길. 연지, 분, 머릿기름, 거울, 빗, 비녀, 바느질함이 험치
따라간 길. 원당사 돌탑은 이끼가 푸르고, 송이 밟는 소리 먼 옛날로 설화처럼
흐르는. 고려 때 목호가 거미줄 같은 눈물을 치며 걸었을 길. 패망한 나라로 갈
수도 없고, 올레 끝집 복숭아 닮은 양씨와 조천포구 부근에 집 짓고 살려고 해
신디. 아즈방은 두린아이 손 잡고, 아즈망은 동골락동골락헌 곤애기를 등에 업
고. 셋아방집 가는 길. 식게 밥 먹으러 가는 길. 무밭을 지나고, 환삼덩굴 우거
진 풀숲을 지나고, 난리 때 죽은 말젯아방 얘기허당, 뭍에 가서 소식 뜸한 족은
아들 걱정허당 보민. 와흘 너머에서 들려오는 여호 울음. 바지춤엔 도깨비바늘
이 달라붙어있고. 삼양에서 신촌 가는 길. 동카름 쪽에서 불어오는 서늘한 밤
바람. 옛날이야기처럼 구불구불한, 신촌 가는 옛길.
♧ 고기국숫집에서 - 김광렬
세 부자가 고기국숫집에 깃들었다
아비는 늙은 노새를 닮았다
어디서든 권위가 안 설 것 같은,
머리털이 몽당비자루 같은,
밑바닥 세월 견뎌가는 듯한,
왜소한 아비와 함께 온 두 남매가
쑥부쟁이처럼 고왔다
아비가 자식들의 그릇에
말없이 돼지고기 한 점씩 얹어주었다
나는 소싯적 찌든 아비를
얼마나 부끄러워했는가
가슴에 아리게 면도날이 서는데
서럽긴 해도
저들은 덜 아프겠다
♧ 물매화 - 문영종
물~매화 하고 읊조리니 여린 개울물처럼 흘러간다. 흘러가는 물에 꽃들이 떠
가는 게 보인다. 가는 바람에도 흔들거리며 눈물을 쏟아낼 것 같고, 이별하는
이를 위해 눈물을 오래 삭히며 간직한 연인 같은 꽃을 용눈의 오름에서 만났
다.
눈물을 보이지 않고 돌아설 수 있을 것 같은 꽃
보고 싶어도 눈물을 안으로 삼키며 향기를 내는 꽃이 여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