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향기

거리에 흐르는 가을의 詩

김창집 2012. 10. 22. 08:21

 

♧ 초대의 말

 

계절의 한복판을 가을이 가로질러 바삐 걷고 있습니다.

지난여름의 뜨거운 폭염과

몇 차례 태풍이 남긴 상흔을 이겨내고

이렇게 또 가을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바람 좋은 이 저녁에 그렇게 지나간 시간을 잠시 돌이켜봅니다.

모든 희망의 싹은 절망의 끝에서 움튼다는 사실

그래서 가을은

꽃이 지고, 낙엽이 떨어지는 쓸슬한 풍경 속에서도

그리운 이들, 사랑하는 사람들의 존재감이

더 따스하게 다가오는 계절이기도 하다는 것을.

 

제주작가회의가 매년 정성껏 준비하여,

시민들과 만나는 본 행사도 어느덧 10여년이 훌쩍 지났습니다.

작년에 이어 다시, 산지천 광장에서 마련된 무대에서

여러분과 만나게 되니 반갑고 기쁜 생각이 가득 차오릅니다.

 

잠시 분주한 삶의 무거움을 내려놓고

몇 편의 시들과, 그 시로 만들어진 노래들을 감상하시면서

깊어가는 가을밤의 서정을 함께 즐겨주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2012. 10. 20.

 

                                 한국작가회의 제주도지회장 김창집

 

    * 참취 

 

♧ 의자 - 이정록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라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 의자 - 이지엽

 

시 쓰는 놈이 왜 그걸

딱딱하다고만 생각하냐

머시냐 거 꽃게 속 연한 속살 있냐 안

그렇게 부드럽단마다

밥이 곧 의자 아니든?

 

어디 뛰다닌다고

다 시가 되드냐

시 쓰는 것 결국에는 엉덩이 아니더냐

지그시 눌러 앉아서

지우고 또 묵히고

 

니 애비도 속창시 읎이

하라는 농사는 않고

탁배기에 막걸리 한 잔, 소리도 잘했어야

이제사 생각해보니

그것도 의자였어야

 

엉거주춤 섰지만 말고

거기 풀썩 앉어봐라

아무리 힘준다고 고것 꼼짝이나 하든?

죽으믄 다 소용 읎어야

그 자리가 꽃자리여야  

 

 

♧ 가을 이야기 - 양전형

 

1

 

가진 것 탈탈 다 털어 내는

은행나무

 

버려진 것들은 바람 몫이다

바람이 비틀비틀 굴리며 간다

맞다 맞다

가을은

떨어져 내려와서 구르며 가는 것

 

2

 

가을은

혼자서 왔다가 혼자 가는 것

 

포르르 떨며

내 안에 단풍들 내려 쌓인다

홀로 내게 들어와

낙엽을 바삭바삭 밟고 있는 누구여,

 

이제는

바람을 휘휘 감아 넣겠으니

어깨를 움츠리고 옷깃을 세우시라

 

 

3

 

아니다 아니다

가을은

오는 게 아니라 가기만 하는 것

우리가 그냥 흘러만 가듯

한낮

방구석에 들앉아

또르르 또르르

가을이 잰걸음으로 흘러가는 소리인 줄 모르고

가을이 왔다고만 박박 우기는

저 귀뚜라미

 

4

 

가을은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아

다만,

내 마음이 붉어지고 있어

어쩌면 가지고 있는 걸 다 놓아버릴지 몰라 라는 말

 

가을은

떠난다고 하지 않아

깃 속으로 깊숙이 고개 숙인 채

뒤돌아보지 않고

작은 공원 속으로 천천히 사라질 뿐

 

그리고 가을은

다시 만나자는 말을 하지 않아  

 

 

♧ 베릿내의 숨비기꽃 - 정군칠

 

물총새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는다.

베릿내에는

고향 뜨며 거둘 새 없던 숨비기꽃 겨우 몇 포기

바다마을을 지킨다.

이 척박한 바위틈에 어머니의 숨비 소리꽃으로 타올라 있다.

제기랄.

지금은 어머니 산소 다녀오는 길

어깨 늘어진 숨비기꽃도 함께 다녀오는 길

봉분의 흙 한줌 가져와 꽃부리 덮어주면

어느새 내 등에 얹혀오는 따뜻한 손이 있다.

 

사라호 태풍이 일던 아침 물이 불어나고

내를 거슬러 오르던 은어떼들로

갈대들의 사타구니는 오싹오싹 긴장을 하고

마을을 에워싼 숨비기꽃은 바람을

잘도 막아 주었다.

다시 태풍이 불었다.

그 이름 없는 태풍에는 희한하게도 물이 줄어들었다.

은어 떼는 흙탕물에 방향을 잃고

갈대들은 몸 추스릴 새도 없이 흙더미에 묻히고

숨비기꽃은 이파리 찢기며 나팔을 불어댔지만

자갈을 퍼 올리는 중장비의 굉음에 묻히고 말았다.

바삐 도망치는 게 한 마리

게 한 마리처럼 집을 빠져 나오는 사람들을 보며

그게 칭원하여 바다는 거품을 물었다.

 

아득도 하여라

강산은 일 년만에도 변하여 그 일 년이 스무 번을 넘겼고

누이의 젖살 같은 베릿내에는

방황의 냇둑을 굽이 안고 돌아

숨비기꽃의 낭자한 상처를 아물리고 있다.   

 

 

♧ 신촌 가는 옛길 - 현택훈

 

  도비상귀도 지나간 길. 연지, 분, 머릿기름, 거울, 빗, 비녀, 바느질함이 험치

따라간 길. 원당사 돌탑은 이끼가 푸르고, 송이 밟는 소리 먼 옛날로 설화처럼

흐르는. 고려 때 목호가 거미줄 같은 눈물을 치며 걸었을 길. 패망한 나라로 갈

수도 없고, 올레 끝집 복숭아 닮은 양씨와 조천포구 부근에 집 짓고 살려고 해

신디. 아즈방은 두린아이 손 잡고, 아즈망은 동골락동골락헌 곤애기를 등에 업

고. 셋아방집 가는 길. 식게 밥 먹으러 가는 길. 무밭을 지나고, 환삼덩굴 우거

진 풀숲을 지나고, 난리 때 죽은 말젯아방 얘기허당, 뭍에 가서 소식 뜸한 족은

아들 걱정허당 보민. 와흘 너머에서 들려오는 여호 울음. 바지춤엔 도깨비바늘

이 달라붙어있고. 삼양에서 신촌 가는 길. 동카름 쪽에서 불어오는 서늘한 밤

바람. 옛날이야기처럼 구불구불한, 신촌 가는 옛길.  

 

 

♧ 고기국숫집에서 - 김광렬

 

세 부자가 고기국숫집에 깃들었다

아비는 늙은 노새를 닮았다

어디서든 권위가 안 설 것 같은,

머리털이 몽당비자루 같은,

밑바닥 세월 견뎌가는 듯한,

왜소한 아비와 함께 온 두 남매가

쑥부쟁이처럼 고왔다

아비가 자식들의 그릇에

말없이 돼지고기 한 점씩 얹어주었다

나는 소싯적 찌든 아비를

얼마나 부끄러워했는가

가슴에 아리게 면도날이 서는데

서럽긴 해도

저들은 덜 아프겠다  

 

 

♧ 물매화 - 문영종

 

물~매화 하고 읊조리니 여린 개울물처럼 흘러간다. 흘러가는 물에 꽃들이 떠

가는 게 보인다. 가는 바람에도 흔들거리며 눈물을 쏟아낼 것 같고, 이별하는

이를 위해 눈물을 오래 삭히며 간직한 연인 같은 꽃을 용눈의 오름에서 만났

다.

 

눈물을 보이지 않고 돌아설 수 있을 것 같은 꽃

보고 싶어도 눈물을 안으로 삼키며 향기를 내는 꽃이 여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