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수리와 졸참나무의 늦가을
세미오름은 제주시에서 한라산이 있는 남쪽으로
약 10km 정도 떨어진 해발 400m 지대이다.
오름 서쪽 계곡에 위치한 숲에는
다른 활엽수들은 거의 잎이 졌는데
이 상수리나무와 졸참나무만이 이렇게
아름다운 갈색으로 변해 있었다.
요즘은 비도 많이 오고 찬바람이 부는 걸로 봐서
얼마 없어 저 잎도 떨어질 것이다.
상수리나무는 참나뭇과(科)에 속한 낙엽 교목으로
키는 20~25m까지 곧게 자란다. 나무껍질은 검은 회색이며,
세로로 갈라진다. 잎은 밤나무 잎과 비슷하게 생긴 긴 타원형으로,
가장자리에는 톱니가 있으며, 잎 뒷면에는 털이 있다.
암수한그루로 5월에 꽃이 피고, 공 모양의 열매는 이듬해 10월에 익는다.
열매인 상수리를 가을에 따서 가루로 만들어 떡 또는 묵을 만들어 먹거나
밥에 섞어 상수리밥을 지어 먹는다. 열매를 삶은 물은 염색약으로 쓰이기도
하며 재목은 기구재나 땔감으로 쓰인다. 우리나라, 중국, 일본, 타이완,
네팔, 미얀마 및 만주 등지에 분포한다.
♧ 상수리나무 밑에 앉아서 - 유소례
찬바람 치는 언덕에서도
마른 상수리나무 잎은 떨어지지 않는다
달리는 바람의 멱살을 잡아 채
현악기 탁음으로 몸을 갈아댄다
휘모리 자진모리 진양조장단으로
목청을 돋우고 있다
그 소리 속에 버물어진
도토리 같은 기억들을 나는 주워 모으고 있다
저 상수리나무 질긴 사랑처럼
언제까지나
어미 살에 붙어 있는 내 살 속의 진양조 춤
깔깔한 장단을 지우고 싶다
자진모리 차분한 가락으로 지우고 싶다.
♧ 상수리나무 떡갈나무 쥐똥나무들 - 이향아
숲길에 서면 나를 헐어 바친다는 것이 무엇인가
애초의 곳으로 되돌린다는 게 무엇인가 저절로 알게 된다
제풀에 흩날리는 잎사귀들을 보면
쓰다 막힌 유서의 절정, 그 마무리를 알게 된다
떡갈나무 상수리나무 쥐똥나무들
잎이 지는 가을 나무들은 여름내 흔들던 두 팔을 내리고
바라는 것 없이 원망하는 것 없이
유순하게 은퇴를 서두른다
햇살은 금실처럼 흘러서 막혔던 물길을 트고
산맥은 산맥과, 먼 바다 물결은 물결들끼리
구름은 제풀에 맺었다가 풀리면서
우리가 떠날 때 지녀야 할 것을 일러준다
돌아설 때 돌아서서 잊어버리더라도
이런 때 부를 이름 하나는 남겨둘 걸 그랬다
상수리나무 떡갈나무 쥐똥나무처럼
회상으로 풀어내는 목이 마른 고백
숲길을 걷노라면 나는 한 마리 흰 새처럼 씻겨서
마음 가볍게 마른 잎 향기를 맡을 수 있다
상수리나무 떡갈나무 쥐똥나무들
♧ 상수리 묵 - 권오범
앞산 하산 길에 만난 진짜 묵
살 떨리게 숭덩숭덩 저며 놓고
막걸리 잔 들고 둘러보니, 아이고머니나
아직도 도굿대가 노인네 따라 춤을 출 줄이야
가난에게 그냥 질 수 없다고
묵 장사 되어 도구통과 싸우느라
꿈마저 송두리 째 바스러진 유년의 엄니가
느닷없이 눈물 따라 아른거린다
어린 것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
시루에 무시로 물 부어
말간 물 나올 때까지 상수리 독기 빼는 일
장작 불 쏘삭대다 묵 누룽지 먹는 것뿐이었다
지긋지긋한 도굿대질 중간 중간
행여 자식들에게 들킬라
눈물마저 체로 쳐 묻었다는 걸
지천명너머 가까스로 깨우친 맷가마리
서울 길바닥에 웬 상수리냐고 지팡이로 툭 치며
속절없이 흐른 줄 알았던 세월이
고스란히 곱사등 되어 솟았다며
천진한 웃음 끝에 아이고 아깝다 던 엄니를 보며...
진짜 묵 만나기 드문 세상인 것을
우물가에 대기 중인 펑퍼짐한 시루 다섯
저걸 언제 다 체에 밭쳐 베로 걸러
한숨 섞어 끓이실까
할머니가 톱톱해진 상수리 국물을 가마솥에 붓고 있다
♧ 상수리나무 숲에서 - 박상건
숨소리 몰아쉬는 용화산 정상에
절벽이 합장하고 서 있다
상수리가 염주알 굴리는 부처님 손바닥의 산길을
정신없이 내려가는데 넘어진 나뭇가지가 내 어깨에 죽비를 쳤다
동행한 노시인은 쉬엄쉬엄 가자 타이른다
펑퍼짐한 바위에 앉을 적 동공에 가득 차 숨쉬던 푸른 하늘
하늘 첨벙이는 물소리에 취해 있는 가지에 피라미 떼 걸터앉고
자갈에 물린 조릿대들이 물 피리를 불어 쌓는다
포롱거리는 새들은 가지의 건반을 두드리고
푸른 숲의 응달에는 서치라이트 불빛처럼 햇살들의 조리개질
지금 숲에는 물빛 마찰음, 허공에는 사선의 가지들이
햇살줄기를 가위질하고 있다
잘려나간 햇살들이 방아깨비처럼 톡톡 튀어오르는 것을 보면
숲의 생명력은 팔짝팔짝 뛰는 햇살의 힘에 있다
햇살 풀무질하는 것은 차고 돌리는 물소리이다
물소리는 기도하는 나무들의 종소리이다
종소리 구르는 나무의 울타리는 여백이다
여백과 여백 사이에 바람이 불고 인정이 쌓인다
생목이거나 노거수이거나 더 큰 여백을 위해
낙엽이 지고 열음한 나무들은 드러눕는다
넘어지면 넘어진 대로 서로의 목침이 되고
팔베개가 되어주는 사선의 삶,
경계 없는 세상이 숲을 이루고
숲에서 노래하는 새들은 숲의 일원이다
이제 그만 일어서자는 노시인이 내 어깨를 토닥였다
비틀어 누운 자리에 몇 평 하늘이 내려와 햇살로 닦을 적
물길은 햇살을 햅쌀방아 찧고
물줄기 따라 가는 산길에 뜀틀 뛰며 내려가는데
몇 주먹의 도토리가 빼꼼한 호주머니의 해방구로 빠져나갔다
토끼처럼 용화산 계곡 바위 징검다리를 팔짝팔짝 건너가고 있었다.
♧ 등신불 - 김수목
상수리나무에 사는 벌레는 3백여 가지가 넘는다고 한다
상수리나무 한 그루가 그렇게 많은 벌레들을 거느리고 사는 줄 몰랐다
상수리나무는 벌레에게 눈, 잎, 꽃, 새가지, 잔가지, 줄기, 몸통, 뿌리까지
내주고도 끄떡없이 선산을 지키고 있었다
성묘 길에 주워온 상수리 보따리를 풀자
끝없이
수많은 종류의 애벌레가 꾸물거리고 있었다
상수리나무는 제 살의 열매까지
모두 벌레들에게 내어주고 있었다.
부처님이 따로 있을 리 없었다.
♧ 續·動動(속·동동) - 문효치
세월이 가면서 그대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구나.
그대의 향기로운 이름을 물으면서
기대었던 소나무,
그때에도 솔방울은 툭툭 떨어졌지만,
바람이 불면서
그대로부터 잊혀져가고 있구나.
그대와 눈맞추며
기대었던 상수리나무,
그때에도 상수리는 무시로 떨어졌지만,
그대로부터 사라져가고 있구나.
떨어지는 솔방울, 상수리 하나도
오늘은 이리도 땅을 울리는가, 가슴을 치는가.
갈잎되어 쓰러지는 풀잎 하나
물길에 잠겨 구르는 돌멩이 하나가
오늘은 이리도 애처로운 몸빛으로 뜨이는가,
눈에 찔리는가
이제는 그대의 등 뒤를 서성거리는
아지랭이 같은 후광으로도 남을 수 없어
허공의 푸르름 속으로
밀려서 밀려서 떠다닐 뿐,
그대의 그리움 밖으로,
아주아주 까마득한 기억 밖으로
밀려서 밀려서 떠다닐 뿐,
떠다니다가
저 혼자 닳아질 뿐,
날마다 기다림과 열정으로
곱게 씻어 간직해 온 목숨,
세월의 바람 속에서
머리마칼 흩날리며
그대도 함께 떠나가고 있구나.
아으, 아으 동동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