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향기

우리詩 12월호의 시와 죽절초

김창집 2012. 12. 10. 12:47

 

겨울 날씨란 종잡을 수 없는 것이어서

검은 구름에 어둑했다가도

가끔씩 그 구름을 걷고

쨍하고 햇빛을 내비친다.

 

아침 한 때 하늘이 크게 열리며

맑은 날씨가 되리라는 예상이

정오를 맞으면서 다시 어두워지는 걸 보면서

가끔씩 세상 돌아가는 이치가 그렇다는 걸 느낀다.

 

원고를 정리하다 잠시 쉬면서

지난번에 배달된 우리詩 12월호에서

시 몇 편 뽑아 죽절초 열매와 같이 올린다.

 

죽절초(竹節草)는 홀아비꽃댓과에 속한 상록 활엽 관목으로

높이는 1m미터 내외이고, 잎은 마주나며 톱니가 있다.

6~7월에 꽃잎과 꽃받침이 없는 연한 황록색 꽃이

수상꽃차례로 핀다. 열매는 둥글며 5~10개씩 모여 달리고

붉게 익는다. 우리나라의 제주도 남쪽, 중국, 일본,

말레이시아 등지에 분포한다.   

 

 

♧ 일출 - 조광자

 

생각하건데, 내가 살아온 날들에서

내세울 만한 가슴 떨리는 절정을 마주한 적 없어

차고 오르는 환희의

뭉클거리는 오르가즘을 느껴본 적이 없네

기호가 헤엄치는 바닷속으로

누군가 전송해 온 몇 컷의 이미지에 홀려

타오르는 저 붉고 장엄한 절정의 순간을 훑는다

무디어가는 육신을 데우기에는 이미 시들한 감각을 세워

푸른 관음觀淫의 가랑이 사이로 아득히 솟아나는 불꽃

부르르 탯줄이 떨어진다

피가 낭자하다  

 

 

♧ 새들의 저녁 - 심우기

 

저물녘의 새들이

노을을 쪼고 있다

강이 흘려 보낸 생을 고개 숙여 반추한다

산들은 침묵의 불 밝히고

다 뜯긴 노을은 산 너머로 가라앉는다

시간의 바퀴에 휘감긴 물뱀

몸이 찢겨도 그의 본성을 잃지 않는다

죽어도 한번 문 것을 놓지 않는다

새들은 날며 먹지 않는다

저녁을 태우는 솔가지 연기가

시끄럽던 새소리를 재운다

서서히 길을 지우는 정적

어둠이 새 귀를 막는다

느리게 움직이는 눈동자

환영처럼 출몰하는 빛

역류의 강을 따라 침식하는 이포 둑

일렁이는 침전물

새들이 낮게 난다

세상에 부유하는 것들을 물고서  

 

 

♧ 장연사지 삼층석탑* - 이동훈

 

처진 어깨를 하고

처진 소나무*를 보러 가는 길이었네,

뻗치고 오르려는 욕망을 어떻게 뉘고 섰는지

가까이 살필 참이었네.

이정표를 대신하던 동창천은

산 그림자를 안거나 밀면서 길을 앞서갔네.

처진 소나무를 지척에 두고

그만 곁길로 꺾어든 건 비트적거리던 마음이

한쪽으로 쏠렸기 때문이네.

돌다리를 지나서 감나무 밭에 이르니

어둑서니 같은 석탑 두 기가 점점 도렷해지네.

이편의 탑은 한때 도랑에 처박혔다는데

저편의 탑을 보다가 알았네.

무너지고 버려진 이편을 끝내 일으킨 건

남겨진 탑의 기도였다는 사실을.

홍시가 익을 때 다시 오라는 말을 뒤로 하고

돌다리를 돌아나가네.

처진 마음을 다리 밑으로 흘려보내니

처진 소나무의

편안한 어깨가 성큼 다가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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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 청도 소재

* 청도 매전면의 처진 소나무(천연기념물 제295호)  

 

 

♧ 살다 보니 - 한문수

 

내버려 둔 것이 어디 세월뿐이겠는가

우린 불려 가는 나뭇잎 같은 거라서

발버둥치다 지친 설움

콱 막힌 울분 하나 달래지 못하고 끌려간다

잠에서 떨어져 나간 시간들이

숨 막힐 듯 달려오는 하루를 보면서

강제로 잊고 억지로 산 날들을

내려놓을 뿐이다

모조리 망각으로 터지는 내게 엮인 인연들이

더는 보이지 않고 더는 들리지 않아

하루가 지나고 계절이 끝나도

아무도 나서지 못했다

내버려 두는 건 늙는 것이라서

불 꺼진 창에 못난 사랑 버리고

꾸역꾸역 밀려오는 오늘

언제 해가 떴는지

제대로 붙어보지 못하고

불덩이로 넘겨야 했다  

 

 

♧ 빈컵 - 박목월

 

빈 것은

빈 것으로 정결한 컵.

세계는 고드름 막대기로

꽂혀 있는 겨울 아침에

세계는 마른 가지로

타오르는 겨울 아침에.

하지만 세상에서

빈 것이 있을 수 없다.

당신이

서늘한 체념으로

채우지 않으면

신앙信仰의 샘물로 채운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는

나의 창조의 손이

장미薔薇를 꽂는다.

로우즈 리스트에서

가장 매혹적인 조세피느 불르느스를

투명한 유리컵의

중심에.  

 

 

♧ 조합원 - 김승일

 

  식기 시작한 것들은 미끄러웠어 할머니가 쏟은 가래, 도룡농 알, 갓난 아이, 욕조 위로 떨어지는 햇볕, 개천으로 뛰어드는 친구들, 친구들을 따라 뛰어드는 나, 딛는 곳마다 물이끼가 밟히고 수온은 미지근했지

 

  머리가 오백 원짜리 동전만한 올챙이들 나는 올챙이가 초식동물인 줄 알았어 한 놈 대가리에 열이 붙어 씹고 있을 적에도

  풀을 뜯어 먹는 줄 알았어 개미떼가 빨고 있는 사탕 파리떼가 엉겨붙은 석양녘에도 피 흘리지 않는

 

  내 또래 애들은 물이끼를 밟고 풍덩 넘어지는 것을 좋아해 그래서 나도 넘어져봤어 친구들, 친구들처럼… 꿀꺽꿀꺽 개천 물을 마실 때마다 가시가 달린 청각靑角 처럼 비린내처럼 쉽게 팬티 속으로 들어오는 것들

 

  한 번 들어온 징그러움은 영원한 협력자다

    

 

  우리가 걸어가면 우리는 네 마리 도롱뇽들, 따라오던 내 동생은 아까 넘어져서 돌쩌귀에 머리를 찧었는데 아직 거기 꼼짝 않고 누워 있는데 피는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지 친구들은 계속 걸었고

  나도 따라 걸었어 우리는 네 마리 도롱뇽들 물을 너무 마셔서 콧물만 나왔어

 

  야광 잠바를 입은 친구가 신발 사러 엄마랑 백화점에 간대 그런데 기침을 자꾸 하는 애도 다섯 시에 태권도를 간대

  내 동생도 집에 가서 설거지를 해야 하는데

저렇게 누워만 있어

 

  우린 꽤 멀리 왔지? 그런데 다들 어디 갔니? 난 우리가 어딘가 당도當到하려는 줄 알았는데

 

  뒤집혀진 장갑 속에서, 기름에 전 장화 속에서

나 알을 찾았어 축 늘어진 청포도, 청포도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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