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카 일기

수크령에 눈이 나리면

김창집 2012. 12. 13. 10:57

 

눈이 펄펄 날리는 들판을 쏘다니다

돌아오는 길

오솔길에서 만난 수크령에는

이렇게 소복하게 눈이 나려 앉았다.

 

까만 털에 눈이 앉으니까

그 모습이 특이해 보인다.

 

수크령은 볏과에 속한 여러해살이풀로

높이는 30~80cm이고, 줄기는 뭉쳐나며,

잎은 빳빳하고 끝이 뾰족하다.

9월에 이삭이 잎 사이에서 나오는데

빛깔은 흑자색이고 가시랭이와 털이 빽빽이 난다.

들이나 양지바른 곳에 저절로 나며

아시아 온대에서 열대까지 널리 분포한다.

 

 

 

♧ 겨울 회상 - 이일영

 

 어느 겨울날 전라도 해남 청룡산 중턱에 하얀 눈 발목까지 소복하게 쌓인 채 그래도 눈이 오는 날이었어, 운동화에 가는 새끼줄을 매고 튼실한 몽둥이 하나씩 들고 영리하기로 소문난 팽나무집 하얀 재동이하고, 누런 개 진순이를 앞세워 동네 청년 들이 인솔하는 토끼몰이를 따라 갔었어, 듬성듬성 열을 지어 산 아랫목에서부터 눈 덮인 산을 덮쳐가는 사냥꾼이 되어 달리던 나,

 

 몸통이 잘린 채 옆으로 가지를 벋은 山동백나무 두어 송이 핀 꽃 하얀 눈 속에 놀란 가슴을 재고 호랑가시나무 붉은 열매가 푸른 가시 잎에 달린 그 빛깔 너무 고와 멈춰선 때 컹컹대는 재동이 짖는 소리 나고, 와! 하는 함성이 산울림 하는 그곳 사슴 같은 노루가 산 위로 달려가고 소리 앞세워 쫓는 청년들이 있었어,

 

 헌데 바로 내 눈앞에 작은 바위가 시선을 가린 유난히 많은 눈 쌓인 그 곳 잿빛 토끼 한 마리 버둥대고 있었어, 큰 눈에 잔뜩 겁먹고 놀란 가슴 함께 껌벅이는 토끼에게 사냥꾼인 나는 나도 모르게 도망가라고! 도망가라고! 손짓을 했어, 토끼는 놀란 몸짓으로 옴팡진 눈 구덕을 빠져나와 바위 뒤편 틈새 굴로 빠르게 사라져 갔어, 호랑가시나무 붉은 열매만 남겨둔 채,

 

 오늘밤 눈이 오려는 듯 기척 하는 하늘 “산짐승은 잡는 것이 아녀” 할머니 음성이 무겁게 걸린 하늘에 잿빛 토끼의 눈물이거나, 조용히 괴는 눈물이거나, 가슴을 흐르는 눈물이 얼어붙고 있어!   

 

 

♧ 겨울 숲에 눕다 - 강효수

 

허하게 떠있는 심장의 공명 속에서

비틀거리며 떠오르는 차가운 태양의 이유

명징할 수 없어, 거침없이 겨울 숲으로

바삭거리는 낙엽, 무상한 마침표 위에

침묵하는 바람 되어 눕다

 

겨울 하늘은 너무 높아 싫다

공간과 공간 사이에 존재하는 공허

겨울 하늘은 너무 멀리 있어 싫다

느낌표의 무덤에 누워 부대끼며

차가운 가슴 녹이는 잔설의 비애여

 

하늘에 뿌리심은 겨울나무는

낙엽의 심연 대지의 심장에 가슴 묻어

깊은 호흡 깊은 명상의 동안거에 들었다

낯선 침입자가 일으킨 적요의 파문

무심히 침묵할 뿐 잠들지 않은 겨울 숲

 

마른 것들은 모두 무겁게 아프다

떨어져 말라 부서지는 것들은 모두

까칠한 가시 하나쯤 품고 있을 일이다

마른 것들은 가볍다, 쉽게 부서져 좋다

남자, 겨울 숲에 눕다   

 

 

♧ 겨울 소묘 - 박종영

 

가장 부담스러운 겨울 초입

목마름으로 야위어가는 노을 녘

남은 한 장의 달력이 검은 숫자를 안고

서운해 하는 것은 흐르는 세월 탓이라지만

숫자의 넘김이 날짜에 예속되어 더 슬픈 것이다

그렇다면 그 슬픈 하루에 갇혀 즐거워하는

세상의 웃음은 과연 누구의 행운인가

푸른 물결 위에 팔랑대는 한 개 나뭇잎 배,

그 지친 항해는 누구의 인생길인가

언제나 출발의 길에 하늘 끝 지평선은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아

맴도는 지구의 둥근 속임수다

발가벗은 숲에 들어 귀를 기울인다

자연스럽게 굵어지는 나이테의 움직임

그 늙은 나무의 연륜이 향기로운 이유는,

누구의 허락도 없이 훔치고 달아나는

시간의 곡예여서 더 밉다

여기에서 비로소 우리의 꽃은,

어떤 이름을 붙여 주어야 찬란할까?

오늘은 궁리가 크다. 

 

 

♧ 가을 마중 - 권오범

    

귀뚜리 기별 받고 선바람에 나간 광나루

갈대들이 밤새 별빛에 머리 감고

에부수수하게 털거나 말거나

햇볕 채뜨려 먹고 눈부시게 곤댓짓하는 억새들

 

강변 따라

잡초들 넘나들지 못하도록

오래 전에 단단히 비끄러맨 마사토 길

사그락사그락 끌어당긴다

 

칠칠맞아 고샅이 된 싸릿골 언덕 넘어

하릴없이 축 늘어져

수크령들과 함께 서성대는 버드나무 지나

미사리 향해 시방 한 시간 째

 

소근대는 철새들에게 한눈팔다

뒤돌아 강 건너 아차산 풍경 가슴에 담다보니

하얀구름 한 무더기가 나와 동행하고 싶은지

파란 하늘바다 가로질러 헤엄쳐오는 이 기막힌 한낮  

 

 

♧ 가을이 익어갈 때면 - 松花 강 봉환

 

길섶 따라 풀벌레소리 귀 기우리며 걸어가다 보면

언제나 푸르를 것 같은 새파란 길 섶 잡초들 사이로

후-두-둑 하는 소리에 나도 몰래 인기척에 놀라서

제 갈 길 바삐 사방으로 흩어져 날아가는 참새 떼들

 

그중에는 아침마다 방울방울 이슬을 머금기도 하고

노을빛을 받아 금빛 찬란하게 하늘거리듯 맞이하며

은은하고 감동적인 가을에 정취를 알리는 수크령에

왠지 모를 설렘에 마음마저 빼앗기던 시절이 있었지

 

하염없이 걷는 산책길에 만나는 이름 모를 잡초들에

단연 돋보이듯 석양빛에 짙어져 가을을 알리던 서곡

그곳에 나 홀로 뽐내듯 우쭐대며 가을색이 돋보이고

가을을 알리려는 듯 솔솔 부는 바람에 하늘거리기만

 

그 옛날 풀을 매어 은혜를 갚는다는 풀, 수크령 군락

결초보은이라는 고사성어마져 생겨나게 한 낯익은 풀

이른 아침부터 모두 수크령 풀 섶에 묻혀 조잘거리듯

시끄럽게 쪼아대는 참새 떼에게 더 없는 먹이 감으로

 

가을은 이렇게 조용한 풀섶 합창에 익어가는가 보다.  

 

 

♧ 겨울 초입에서 - 정윤목

 

이슥한 밤 거센 바람,

겨울 몰고 오는 말발굽 슬픔의 소리들

광야의 어지러운 세상 살아가시는

하루를 살고도 내일 더 살아갈 수 있는 은총

소록소록 더욱 깊은 잠으로 고마워하시는 모습

오, 눈이 부시게 아름다우셔라

겨울 다가올수록

더욱 뜨겁게 사랑하고 싶습니다

 

 

얼마를 더 걸어가면

어머니 품 속 같은 평안함에 정박할런지,

바람의 소리

다만 거세게 타이릅니다

일어나라

흔들어 깨워라

더욱 세게 흔들어 깨워라

초극에 이르는 깨달음으로

꼬옥 꼬옥 다가서는 아름다움

하늘 끝에서 고단히

백마를 타고 내려오는 은하수

희디 흰 눈꽃송이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