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카 일기

겨울에 피는 팔손이 꽃

김창집 2012. 12. 30. 00:31

 

저 따뜻한 곳에서 온 팔손이

이제 제주 해안 가까운 숲속에 자리 잡아

이 겨울에 환하게 꽃을 피운다.

 

아무리 눈이 많이 내려도

아무리 기온 급강하한다 해도

혼자서 연말을 장식한다.

 

혼자만의 이기심을 버리고

조금이라도 더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

고군분투하는 몸부림이어!  

 

 

♧ 안부 2 - 황지우

 

안녕하신지요. 또 한 해 갑니다

일몰의 동작대교 난간에 서서

금빛 강을 널널하게 바라봅니다

서쪽으로 가는 도도한 물은

좀 더 이곳에 머물렀다 가고 싶은 듯

한 자락 터키 카펫 같은

스스로 발광하는 수면을

남겨두고 가대요

그 빛, 찡그린 그대 실눈에도

對照대조해 보았으면, 했습니다

 

마추픽추로 들어가는 지난번 엽서,

이제야 받았습니다

숨쉬는 것마저 힘든

그 空中國家공중국가에 제 생애도

얼마간 걸쳐놓으면 다시

살고 싶은 마음 나겠지요마는

연말연시 피하여 어디 쓸쓸한 곳에 가서

하냥 멍하니, 있고 싶어요

머리 갸우뚱하고 물밑을 내려다보는

게으른 새처럼

의아하게 제 삶을 흘러가게 하게요   

 

 

♧ 연말회송(年末悔頌) - 정재영(小石)

 

바퀴는

회전만 하고 있어서

제자리에

있는가 했는데

 

수레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가고자 하는 곳까지

언제 움직여 놓여져 있었다

 

세끼 밥만 먹고 지내며

하루 하루

시간만 보낸 줄 알았는데

 

돌아갈 길

저리도 까마득한 곳

멀리도 와 있다

 

떠나서

가야할 길도

보이지 않고 아득한데

새것도 헌것도

찢어낼 수 없는

 

모두가 이어진 길 위의

간이역일 뿐이다   

 

 

♧ 연말 풍경 - 손병흥

 

온전한 정신적 휴식마저 미룬 채

마냥 쫓기듯 쉴 새 없이 살아온 한해

그저 다 놓고 다 잊고 푹 쉴 수 있는

배부른 영혼이 너무나 부러운 시절

입김 서리는 계절 가지 끝 매달린 숨결로

내 삶마저 비틀거리듯 햇살 내리는 날이면

늘 넉넉하기만을 바라고 섰던 욕심 물리고서

그냥 가끔씩 배부른 영혼임을 부끄러워 해보던

아름다운 회상 설움 참회 모두 다 안쓰러워

그동안 잃어버렸던 내 마음 빛 수를 놓아

빛이 사라진 밤하늘 걸어온 발자국 소리를

고요히 조심스레 즐겁고 신나게 챙겨보려다

왁자지껄 한바탕 가락 나부껴 흘러버린

온 가슴 찔러 대던 깊은 갈빛 그리움 하나.   

 

 

♧ 연말의 달력을 보며 - 김내식

 

홀로 남은 달력 한 장

또 한 해를 덧없이 보내는

허전한 마음에 더욱이 외로우나

그나마 성탄절이 표시되어

한결 기분이 나아진다

 

가화만사성을 읊조리며

강아지처럼 교회에 따라다녀도

아이들도 받아먹는 성찬식 포도주

세례 못 받는 내 앞을 스쳐가더니

사랑의 빛으로 다시 온다

 

 

빠르게 중반으로 들어서고

거리에 캐럴송이 달려 나오면

첫눈처럼 고요한 기쁨으로

어둡고 건조한 가슴 속이

환하게 밝아지리라

 

왠지 모르게 느껴지는 허무를

환락의 빛으로 메우려드는

각종 모임의 날자들과

성탄절 표식을 번갈아 보며

마음을 가라앉힌다   

 

 

♧ 베스트셀러 - 황현미

 

연말이 되면

닳고 닳아 너덜너덜한

나만의 베스트셀러 가계부

 

싼게 비지떡이라지만

값싸고 질 좋은 물건 고르려

동전 몇 닢 아낀 흔적이

고스란히 스며 있다

 

멀리서 노다지 찾을

용기 없는 나에게

그 날 그 날 기록이야말로 금광이었다

 

웃음꽃 한 다발 식탁에 올리고

둥글게 삶을 조각하는

나만의 베스트셀러

 

내년에도 어김없이 너덜너덜하겠지만

내 삶의 무늬인 것을,

사랑하고 또 사랑하리라

 

 

♧ 가는 세월 - 松花 강봉환

 

2층 내 구석방 노트북 앞, 탁상 달력

어지럽게 빼꼼이 적혀진 새김글들.

 

부지런히 오늘도 하루가 가고 또 내일,

비록 내 변화 없는 일상들을

서녘 빛이 창문 너머 비추일 때면

붉은 색 펜만으로 동그랗게 그어 가며

기억하고 싶지 않은 날들이지만,

그렇게라도 무언가 적어보며

내 마음을 공허하게 새겨 가고 있다.

 

 

12월하고도 벌써 중순이 지나,

거리엔 연말분위기 세모의 종소리가

멀리서 나지막하게 들려 나오고

내 조그마한 구석방 후미진 한 켠

오래된 오디오에선 어김없이

조영남의 [지금]이라는 가요마저

오늘따라 더 힘없이 외로이 흐른다.

 

지금, 내가 있어야 하고 떠나가야 할

그 어떤 순간은 아닐 런지,

결코 두마음에 선 체, 희미한 등불 밑,

내 무딘 가슴으로 감내하듯...

오직 붉은 색 펜으로 마지막 남은 달력에

가는 세월을 붙잡듯 북북 그려대 가며

 

또다시,

눈 먼 새와 같이 살자하며 무거운 짐을 실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