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카 일기

새해, 하얀 눈길 위로

김창집 2013. 1. 2. 00:02

 

 오름에 앞장서 오르는데

숲 사이로 깨끗한 눈길이 열렸다.

아무도 가지 않은 눈밭 위에는

가끔 노루가 지나다녔다.

 

올해는

새롭게 마음을 다지며

깨끗한 눈길 위를

마음껏 걸어가고 싶다.   

 

 

♧ 눈길에 만난 새날 첫 것들의 발자국 - (宵火)고은영

 

밤을 틈타 하얗게 서설이 내렸다

한파와 한파 사이 해 뜰 창에

가만히 세상의 첫날이 밝고

첫날 첫 것들의 발자국은 시리도록

아름다운 풍경으로 눈부시다

 

그대와 나의 해후는 서러운 무일푼이어도 좋다

환상은 현실을 깨우쳐주는 몽환의 무덤이어도

피부로 느끼는 서러움만큼 리얼한 일도 없다지만

온 산야는 카랑한 눈꽃들이 쨍쨍하게 만발하였다

 

잡풀의 대궁에도 눈꽃은 오히려 환하다

소복단장 한 겨울의 얼굴에

동면의 긴 잠에 빠진 봄의 내음을 그리며

내 영혼의 때를 말끔히 씻고 싶다

 

그리고 다시 세상을 향하여

첫 것들의 순결과 사명이 사랑임을 알기에

내게 남은 것들이 결코, 부끄럽지 않은

충분한 축복과 은혜를 감사하며

경건한 기도로 저 눈 위에 첫 발자국을 찍고

세상으로 귀환하고 싶다   

 

 

♧ 눈길을 가며 - 구재기

 

나의 길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제부터 시작이어야 한다

하늘로부터 이어받은,

내 하이얀 속살을 스쳐 지나간 발자욱

결코, 몇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더 머얼리, 더욱 더 멀리

가야 할 길 앞에서

눈물은 완전한 끝이어야 한다

떠나버린 바람아

이제는 정말

아픔도 마지막이어야 한다   

 

 

♧ 눈길 2 - 구재기

 

삼경이 지나면서

밖에서는

바람이 불고, 그리고

길을 덮는 눈발 소리

 

슬슬 치마끈이

풀리는 듯

바람에 쓸리는 소리

 

불모지

겨울 숲에도

길은 있었다

 

시간을 타고 흘러내리는

머언 먼 어둠 속 풍경 소리   

 

 

♧ 눈길 - 김유선

 

눈송이 하나에 얹혀오는 너는

나의 무엇인가

눈이 내리면 마음에서는 지레

분홍꽃숭어리 벙근다

나는 잠시 모든 무게를 벗고

눈송이 하나만의 가벼움으로

어디든 갈 수 있겠다

 

맨 처음 너의 어깨에 앉으리라

주소불명의 너는 차라리

견고한 희망이다

 

저 막힌 길, 황막함은 겨울의 몫이 아니었다

貧者빈자의 꿈꾸는 빈잔 속에서

꽃잎이 되는 눈송이

 

어두운 밑그림 속에서 찾아내는 너는

너에게 그는, 그에게 나는

눈송이 하나만큼의 중량인지도 모른다

곧 녹으리라.   

 

 

♧ 눈길 - 변학규

 

살아도 늙어 가도 인생은 새로 오고

저 산도 세월을 앓아 황토벽이 무너지고

백설이

갈대꽃 날려

가지 끝에 울어라.

 

한 발짝 옮겨 앉아 높이 드는 기지개를

새벽 별 가슴 펴고 서릿발도 매운 길에

연달아

바람이 분들

안고 가는 아침 해.   

 

 

♧ 눈길을 걸으며 - 강대실

 

  눈길을 나선다 입춘이 내일인데 길이란 길은 끝없이 흰

길로 통하고 금방 스친 이가 찍은 발자국까지 숨어버린 눈

길 소록소록 걷는다 속에 사그라지다 남은 그리움 조각 눈

속에 빠끔히 고갤 내민다 추억이 서린 길 따라 걷는다 눈꽃

으로 피워내며 이슥토록 걷는다 이 길 다 가고 나면 그리움

이울고 말겠지 어느새 가로등 하얀 빈 터에 기다려 서 있는

문 앞에 당도한다 툭툭 그리움 털어 낸다 눈물을 닦아낸다.   

 

 

♧ 눈길 - 유용선

 

시야를 가리운 태양의 눈이

만 개의 싹으로 뿌려지는 동안

生을 걸친 옷깃이 지나간 자리에

밟힌 자욱 같은

흰 가르마가 열린다   

 

 

♧ 숫눈길 - 권경업

 

아무도 울어보지 않은 길

갈참나무도 힘겹게 서 있는

볕들지 않는 천태산 북쪽 비탈

그대에 앞서, 뽀드득 뽀드득

먼저 울고 싶었습니다, 울면서

가지런히 그 작은 걸음으로 밟고 가기를

그렇게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을 하얀

숫눈길이 되고 싶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