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카 일기

우리詩 1월호의 시와 수선화

김창집 2013. 1. 9. 09:40

 

 생명과 자연과 시를 가꾸는 ‘우리詩’ 1월호가 나왔다. ‘우리詩’ 칼럼은 조병기의 ‘감동의 시를 기다리며’. 신년 특집 지상 대담으로 ‘한국 사회에서 시인이란?’을 주제로 김백겸 이동재 황정산 이병금. ‘신작시 34인 選’은 김동수 박승미 김영호 백인덕 윤향기 송문헌 김명원 김금용 최정남 황희순 권혁수 김연숙 김영찬 도경희 권순자 유진 김화순 윤명수 유순애 이재부 황성곤 김선자 임미리 장이엽 김대호 김채운 김경성 김병철 김진돈 도복희 임채우 신단향 양윤덕 이소율의 시를 각각 2편씩 실었다.

 

‘우리詩’ 서평은 신현락 시집 ‘히말라야 독수리’를 놓고 염창권. ‘내가 읽은 시 한 편’은 김기택의 ‘나귀’를 조삼현 시인이, 이범철의 ‘개심사’를 박원혜 시인이, 남대희의 ‘사다리’를 이동훈 시인이 썼다. ‘시안으로 읽는 우리 문화’는 박상미 시인이, ‘이달의 시들’은 박수빈 시인이, ‘우리詩 에세이’는 조경진 시인이 맡았다.

 

‘신작시 34인 選’에서 임의로 8편을 골라,

한창 피기 시작한 제주수선화와 같이 올린다.  

 

 

♧ 직선 - 김동수

 

한 가닥

침묵 속에

 

길게 잠든

 

저, 수많은 곡선의

함성들

 

휘어져 있구나.  

 

 

♧ 성자(聖者) - 김영호

 

때 절은 몸을 씻어 준다.

비틀어진 목을 바로 펴주고

축 늘어진 어깨를 곧게 세워준다.

쪼그라든 가슴에 탱탱한 희망을 채워주고

푹 꺼진 뱃속에 푸른 산소를 먹인다.

 

하루에 수많은 와이셔츠 환자를 치유하는 성자가 있다.

이른 새벽부터 이마에 구슬땀을 흘리며

종일 세탁을 하고 다림질을 하는 사람이다.

 

자식들의 교육을 위해 조국을 떠나

이민의 삶을 개척하는 전 대기업의 영업부장,

열심히 재봉틀을 돌리는 아내와 함께

어깨 팔 통증으로 깊은 잠을 못 이룬다.

때로는 불경기에 벼랑 끝에 서 있는 듯,

외로움과 고달픔에 남 몰래 흘리는 눈물.

그러나 자식들의 마음눈은 본다, 아버지의 그 몰래 흘리는 눈물을.

그리고 자식들은 아버지보다 더 깊게 운다.

아버지의 마음눈도 본다, 자식들이 힘든 학업으로 몰래 흘리는 눈물을.

그리고 아버지는 자식들보다 더 깊게 운다.

그들의 눈물이 가는 길이 같은 길이다.

부모의 피 땀이 자식들의 꿈의 씨앗이다.

아버지의 이마에서 사랑의 시가 새어 나온다.

땀방울이 시의 언어이고 흰 와이셔츠가 시의 옷이다.

근육통 관절염으로 하늘에 기도를 올린다.

낯선 문화, 낯선 말, 낯선 환경을 겁내지 않는다.

돌을 쥔 다윗처럼 다리미를 들고 담대하게 대적한다.

고국의 넓은 집, 안락의자, 다정한 친구들을 생각하지 않는다.

 

세탁소가 십자가를 메고 피 땀을 흘리는 거룩한 성전(聖殿)이다.

 

자식들이 조국과 이 땅에 천국을 건설할 자랑스러운 국가 대표선수들이다.   

 

 

♧ 뒤안길 - 송문헌

 

시간이 멈춘 듯

허름한 이웃들이 어깨 기대고

정답게 살아가는 골목어귀 허물어진

담장너머엔 돌아 갈 수 없는 낡고 녹슨

시린 기억이 머물던 자리

 

굽이굽이 서른 두 굽이

괜스레 설레며 넘나들던 고개 그

산 너머 작은 읍내 언저리에는

함박꽃잎이 벙글 듯 환희 맞아주던

오래된 그리움이 살던 곳 

 

IMF여파로 이 십여 년 쌓아올린 내

모든 것을 잃고 도망치듯

산중 절집에 들어 상실의 마음을 달래던

한 겨울, 그는 어찌 알고 찾아와

언제고 마실 오라하고

 

온갖 망상으로 잠이 오지 않는 밤

산사를 내려와 찾아 가면 스스럼없이 맞아

아무렇지도 않게 자고 가라고

권하기도 하던 순정한 기억을 이젠

은혜로운 추억이라 하리   

 

 

♧ 새 한 마리 - 김금용

 

목이 쉰 겨울비

이른 아침에 더 쿨룩거린다

 

간 밤의 추위를 견디지 못한

하얀 새 한 마리

강물 위로

발 늘어뜨리며 날아간다

 

비가 새를 쫓는지

새가 비를 쫓는지

 

멈추지 않는 빗물 채찍에

찢겨진 하늘 한 귀퉁이까지

부리에 물고

공중에서 허둥거리는 하얀 새

 

땅은 여전히 위험하고

하늘은 여전히 낯설다  

 

 

♧ 빈칸 - 황희순

 

마시다 남긴 소주를 가져와

민들레꽃 몇 송이 담가두었다

 

오래된 꽃술은

밤에만 피어난다

 

버려도 그만인 그것은

각각의 몫을 뺀 나머지다

 

여직 살아남은 나도, 더 이상

셈이 불가능한 나머지다

 

자식 몫 아내 몫 어미 몫을 뺀,

있으나마나, 텅텅 빈

    

 

♧ 기린과 아카시아 - 권혁수

 

1.

기린은 동물원 철망 너머를 기웃거렸다

아카시아 나무가 보고 싶어

너무 보고 싶어

목을 길게 길게 내뻗었다

 

2.

아카시나무 한 그루 초원에 서 있다

 

기린이 걱정스러워

너무 걱정스러워 그림자 길게 늘려

너도 기린인가 흔들어보았다

 

기린이 머물던

그늘을 한 발로 쓰윽쓰윽 더 늘려 그려본다

그림자가 늘어난다

가지를 길게 길게 뻗었다

 

3.

기린이 솜사탕 구름을 보내준다

아카시아나무에게

 

아카시아나무가 꿀 향기를 보내준다

기린에게 

 

 

♧ 자벌레 - 유순애

 

허리가 구부정한 할머니

지팡이로 더듬더듬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다

 

허리를 굽혔다 폈다

거리를 가늠하면서

한 발 한 발 걸어가고 있다

 

지구의

표면을

다독거리고 있다

 

급하게 굴러오던

바퀴들이

마음을 비운다

    

 

♧ 구름의 주소 - 이재부

 

무덤도 없는 풍장의 바람 길

영혼, 혼백의 주소지 있을까

 

그리움이 찾아갈 인연의 길을

헝클어 흩어 뿌린 한줌의 재

 

저승길 이정표도 날아가고

흔적도 없는 바람의 전설

 

사랑도 명예도 구름인 것을

호수에 드리운 구름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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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9월 28일 장례식에 다녀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