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향기

충남작가시선 7 ‘미소 한덩이’

김창집 2013. 1. 11. 07:23

 

충남작가회의 시선 편집위원회에서

시선집 7집 ‘미소 한덩이’를 내었다.

 

제1부 ‘외발로 일어선 아우성’에는

여덟 시인의 시와 시작 노트를

제2부 ‘쪼끔은 더 따뜻해질 거’에는

열한 시인의 시와 시작 노트를

제3부 ‘세상의 흔들림을 지켜보고 있다’에는

여덟 시인의 시와 시작 노트를 싣고 있다.

 

도서출판 '심지' 발행으로

값 1만원이다.

 

이 중 임의로 여덟 편을 골라

지금 한창 추운 날씨를 녹이고 있는

남천 열매와 함께 올린다.

 

 

♧ 독한 놈 - 김영서

 

산삼을 캤는데 임자가 없다

혹시나 하여 술에 담가놓았는데

해가 바뀌어도 술과 삼이 섞이질 않는다

하기야 산 속에서 몇 십 년 도 닦은 몸 아닌가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하고

사십도 소주를 부었더니

달포 만에

잎이 하얗게 꽃처럼 피고

술이 누르스름하게 익어버렸다

한잔 머금으니 이런 이런

독한 것들 끼리 엉키는 맛이라니

인생이 향기롭지 못한 것이

독하지 못한 탓이었다면

우리 집에 마실 오시게

산삼주 한잔 어떤가  

 

 

♧ 단비 - 신경섭

 

솔잎 끝 물방울

 

삭정이 무나르는 까치

 

산마루 넘는 안개

 

하얀 노란 푸른 보라

 

저마다 안간힘 쏟아

 

단내 나는 봄  

 

 

♧ 우포 어머니 - 이순옥

 

물이 키운 풀들이 물을 덮고 있다

물속에서 왕버들이 새들을 불러들인다

풀과 새들과 물벌레들이 발을 담그고 산다

수면 아래

고여 있는 물이 맑고 조용하다

 

콩나물 기르는 내 어머니

꽃이 피면 피는 대로 새가 울면 우는 대로

고요히 물빛이 된 어머니

세상은 늪이라 하면 늪이라 하셨다

 

나는 딛고 있는 땅을 늪이라 했다

발 빼지 못하는 진흙탕이라 했다

우포에 가서 가슴으로 어린 것을 기르는

고요한 어머니를 뵙고 오기 전까지는  

 

 

♧ 사그랑주머니 - 이정록

 

노각이나 늙은 호박을 쪼개다 보면

속이 텅 비어 있지 않데? 지 목 부풀려

씨앗한테 가르치느라고 그런 겨.

커다란 하늘과 맞닥뜨린 새싹이

기죽을까 봐, 큰 숨 들이마신 겨.

내가 이십 리 읍내 장에 어떻게든

어린 널 끌고 다닌 걸 야속게 생각 마라

다 넓은 세상 보여주려고 그랬던 거여.

장성한 새끼들한테 뭘 또 가르치겄다고

둥그렇게 허리가 굽는지 모르겄다.

뭐든 늙고 물러 속이 텅 빈 사그랑주머니를 보면

큰 하늘을 모셨구나! 하고는

무작정 섬겨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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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그랑주머니 : 다 삭은 주머니란 뜻으로, 속은 다 삭고 겉 모양만 남은 물건을 이르는 말.  

 

 

♧ 유령들의 저녁 식사 - 이정섭

 

  오렌지 향 아래 넌 집요한 내일을 들려주었다

  갓 데운 얼굴이 눈 붉혔지만 너의 혀와 나의 혀는 서로 다른 위도를 간보곤했다 항로가 궁금한 건 내가 아니라 나를 둘러싼 목소리였으므로 나는 버뮤다에 남겨진 이름이었으므로

  상어의 지느러미를 베어 닿고자 했던 육지에서는 네가 사랑하는 향기와 나를 확인할 수 없는 시간

  소문 흥건한 창밖을 의무감으로 들여다보았다 밤은 건조해지고

  심해의 약속을 잊은 채 입 닦을 겨를 있었을까

  검은 땅 근처 오렌지 향기가 닻을 내리는 순간 네가 내민 부드러운 목소리는 내일의 모사였을까

어떤 여자는 내 눈동자로 빚은 목걸이를 팽개치고 떠나고 다른 여자는 식탁을 둘러싼 구약을 뒤져 나의 정체를 수소문하기도 했다

  낯선 식사가 무르익었다

  소란하게 웃음 터진 건 핏줄 불거진 오른 손이 떨기나무 속으로 사라질 무렵

  웃음이 마르기 전 열쇠를 삼킨 이웃 남자는 새까만 목을 포기했고 십오 층 옥상에서 신발을 벗은 아이들은 자유로운 관절을 비틀어 지상과의 충돌을 감행했다

  너는 믿지 않았지만 호우경보는 만삭의 공주를 섭취하는 것보다 익숙한 풍경이었으므로 나는 피로 물든 회전문 놀라운 백발을 풀어 헤친

  손 없는 혁명가

  향로 밖으로 이어진 낡은 보도 끝 너는 상어 지느러미와 해저로 가라앉는 아이를 주문했다 갓 데운 얼굴이 집단 서식하는 어떤 왕국에서는 털 고운 나를 손쉽게 양념해 내가 없는 내일 어디쯤 둘러앉아 예의 바르게 시식하고는 했다

  식탁에 앉아 눈 붉힌 얼굴을 탐문하는 손님들 배부른 건 그들이었으므로 나는 적란운 근처를 떠도는 이름이었으므로

  오렌지 향 아래 잠들면 당신과의 풋사랑 후에 차갑게 요리되어 나는

  잠들면  

 

 

♧ 싸락눈 - 이진수

 

  어질어질 뒤로 나자빠지도록 연탄 뚜껑 틈새에 코를 박았지

  울퉁불퉁 비포장길 떠나가는 고물 버스 뒷구멍에서 퍼져 나오는 연기가 나는야 구수해 구수해 키득키득 키득거리며 따라 뛰곤했지

 

그저, 그러면 쪼끔은 더 따뜻해질 거 같어서  

 

 

♧ 굽은 몸 - 이현조

 

검정 비닐봉지 호사를 누리듯

유모차를 타고 느리게

굽은 골목을 간다

 

유모차를 밀며 바쳐진 청춘

씨알 굶어진 아이는 떠나고

유모차만 남았다

 

이놈이 자식보다 나서유

애써 위로해 보지만

안간힘으로 유모차에 기대진 몸

아무리 밀어도 거꾸로 돌지 않는 바퀴

 

삐걱이며 가다 서고 덜컹이며 가다 서고

일용할 비닐봉지도 휘청휘청

된서리 맞은 굽은 몸을 모시고

유모차가 굽은 골목을 간다  

 

 

♧ 생生을 배웅하다 - 정낙추

 

아직도 눈물이 남아 있느냐고 바람이 묻는다

그렇다는 대답 대신 고개를 서쪽으로 돌린다

해가 저문 들판에서는

언 땅 풀리는 냄새가 풍기고

지난겨울에도 꺾이지 않은 마른 갈대가 비로소 허리를 접는다

하늘이 흐린 것은

눈물 탓

눈동자를 벗어나지 못한 메마른 눈물 한 방울을

망각의 강물에 던진다

 

사랑했던 날들이 있었던가

스러져 가는 노을을 등에 업고 묻는다

미움을 키운 세월 앞에서 실어증에 걸린 젊은 날은

지나고 보니 별거 아닌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고

고백하지만 이미 해는 기울었다

 

어제는 멀리 달아나고

먼 날은 거울처럼 선명하다

무수한 농담과 진담 사이에서

길을 헤매던 시절이 차라리 좋았다

넘어져도 길을 만들 수 있었으니

 

모든 길이 훤히 보이는 건

제 길만 다니는 산짐승처럼

정해진 길을 가야 한다는 통보다

그 길의 끝자락에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는

生의 계약서를 들춰보며

옆구리 한쪽 빈자리를 담담한 손길로 어루만지려 해도

마음이 먼저 휘청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