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향기

강원작가 15호의 시

김창집 2013. 1. 14. 10:39

 

한국작가회의 강원지회에서

‘강원작가’ 15호를 냈다.

 

‘다시 강원도의 힘으로’를 내세운

이 책은 ‘시가 있는 포토 영상’

‘여는 글’ ‘특집시’ 회원 소설 2편,

회원 28시인의 시, 작가서평,

회원산문, 특집 ‘시비를 찾아서’

신간 소개 등으로 짜여졌다.

 

일별하면서 마음에 드는 시 8편을 골라

자금우와 같이 올린다.  

 

 

♧ 감꽃 목걸이 - 김영삼

 

무슨 언약처럼

포개져 벽에 걸려있는 감꽃목걸이 두개

오래된 곶감 같다

 

하나는 내가 꿰어놓고 궁리하는 초라한 시의 길이고

하나는 아내가 덩달아 만들어 놓은 외로운 꿈길이다

 

땡감 같은 삶이라면

나는 바깥세상과 내통하는 구멍 뚫는 감벌레고

떫은 속살 홍시 될 날 꿈꾸며

구멍 길 막아대는 아내는 측은한 열매살이다

 

빼먹은 곶감자리처럼

군데군데 이 빠진 목걸이가 오늘도 말라간다   

 

 

♧ 하지 - 황영순

 

  사고로 다섯 개의 경추를 잃어버린 언니의 남편인 형부 꼼짝 할 수도 없는 머리맡을 오늘은 어디서 날아왔는지 쇠파리 한 마리 지둥 친다 언니가 딸들을 따라 여행을 갔다 풀빵처럼 희죽해진 언니의 남편 형부의 머랏속이 온통 먹장구름이다 이마에 매달린 벽걸이형 시계의 초침이 지루한 시간 속을 덜컹거린다 감자순에 바람이 퍽퍽하게 들기 시작할건데 씨알에 곰벵이나 먹지 않았을까 처갓집 무논에 벼들은 병치레 안하고 잘 자라고 있을까 올해 비닐하우스에는 무얼 심었을까 생전 농사가 뭔지도 모르는 언니의 남편인 형부는 여행을 간 언니를 기다리며 저물지도 않는 하루 속에 해를 내다 걸며 오늘은 낮이 가장 길다고 

    

 

♧ 낙상홍 - 조광태

 

기우는 계절

끝자락에 서서

가슴에 품은 꿈 떨군다.

 

마지막 남은 미련 하나까지

바람에 흔들리는 갈등 하나까지

내려놓고 놓아준 뒤에

홀가분한 마음속 잎마져 비운다.

 

아무것도 없는 빈 몸이 되고서야

겨울 앞에서 다 버리고 나서야

노을 빛 화관 머리에 이고

계절 바람 비켜 세운다.  

 

 

♧ 섬 - 서이령

 

북적이는 사거리 은행 정문 옆

과일 장수로 나이를 먹는 좌판이 있다

철철이 싱그러운 과일 빛깔과는

대조적으로

쭈글쭈글 늙어가는 호젓한 얼굴

 

밀려드는 종아리들의 인파에 부딪치며

느긋한 단내를 흘러 보내고 있다

 

밤이면

등대처럼 밝혀지는 갓 쓴 백열전구

주름진 손등에 선명히 드러나는

철심 힘줄이 춤을 추는 듯

인파를 움켜잡는

 

도심에 떠 있는

인고의 섬이다  

 

 

♧ 검정개 - 고진하

   -인도 시편

 

  식솔도 없는 외톨이가 아니구나. 붐비는 식당 앞에 퍼질러 앉아

  네 마리나 되는 새끼들에게 마른 젖을 물리고 있는 검정개. 아까 노천 화장터 부근에서 어슬렁거리던……

  저렇게 빨리면 젖몸살이라도 날 것 같은 비쩍 마른 개. 사납게 덤비는 새끼들에게 마른 젖가슴을 내맡기고 있다 지글지글

  타다 남은 누구 종아리 살이라도 뜯어먹고 왔나, 누런 갠지스 강물 들이키다 거기 퐁당 잠긴 해님 날개 죽지라도 뭉텅 베어 먹고 왔나.

 

  저마다 이쑤시개를 물고 나오는 점심시간. 붐비는 식당의 손님들이 다 빠져나가도록,

  마른 젖꼭지를 새끼들에게 물린 채 곤히 오수(午睡)에 빠진, 검정개의 수유는 아직 끝나지 않고 있다 꿈속에,

  누구 종아리 살이라도 찾으러 오대양육대주를 발발거리고 다니는지.   

 

 

♧ 박수근마을 - 정현우

   --거름

 

  정림리 마을 어귀, 늙은 농부가 두엄을 퍼내고 있다. 겨우내 읽은 몇 줄의 문장과 겨우내 그린 몇 점의 그림, 불면과 불운은 아직 발효되지 않았다. 잡념 무성한 내 사유의 밭엔 검은 폐비닐만 두엄처럼 쌓여 있다. 썩고 싶어도 썩을 수 없는 검은 폐비닐처럼 그 동안 나는 올지 못했고, 긍정의 과잉을 욕했다.

 

  미안하다 하지만 나도 거름을 내고 싶다. 소리 내어 밀린 울음을 울고 싶다.  

 

 

♧ 산천 - 이상국

 

벼랑 끝에 진달래 폈다

 

천 년 전 그 꽃이다

 

오늘 이렇게 보고

 

언제 어디서 다시 만나자는 말도 없이

 

저 구부러진 산천(山川) 어디로

 

나는 차로 가고

 

저는 걸어서 간다  

 

 

♧ 끝에 피는 꽃 - 김인자

 

제 속으로 끓여

다 내어주던 냄비가 바닥꽃 피웠다

생을 다할 때면 꽃을 피우는가

한 생애가 부르텄다

 

한 송이 꽃을 피우는 일은

안고 있던 불덩이 내려놓는 일

가슴으로 삼킨 눈물 쏟아내는 일

 

바다보다 더 푸른 서방을 바다에 담보 잡히고

하루하루 던져 주는 생선으로

다섯 남매 키웠다는 요양원 순이 할머니

야위신 얼굴에 저승꽃 만개했다

 

-할머니 얼굴에 꽃이 피었어요.

-그짓말 말어, 꽃이 왜 내 얼굴에 피? 마당 끝에 피지.

 

순이 할머니,

한동안 해죽해죽 애기 같은 웃음을

방마다 환하게 뿌리셨다는데

 

그 해 가을

주인을 기다리던 마당가 꽃들이

하나같이 씨앗을 품지 않았다는 흉문을

꽃피는 봄날에서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