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카 일기

입춘에 보내는 개불알풀꽃

김창집 2013. 2. 4. 10:09

 

새해 첫 절기 입춘(立春).

촉촉이 땅을 적시는 봄비가 내린다.

입춘대길(立春大吉)

옛날에 대문마다 글씨를 뽐내며

붙여있던 모습이 아른거린다.

 

어제 며칠 갇혀 지냈던

안방을 과감히 탈출하여

따뜻한 남쪽 서귀포 오름을 다녀왔다.

우보악 분화구쪽으로 기울어진

따뜻한 양지쪽 밭이랑 사이에

이 꽃, 소담스레 봄볕을 쬐고 있었다.  

 

 

♧ 난 지금 입덧 중 - 목필균

    -입춘

 

하얀 겨울,

치마끈 풀어내고 살그머니

가슴에 작은 꽃씨 하나 품었다.

 

설 넘긴 해가 슬금슬금 담을 넘자

울컥울컥 치밀어 오르는 역겨움

토해도 토해도 앙금으로 내려앉는 금빛 햇살

 

매운 바람 속에 꼼지락거리던

꽃눈 하나 눈 비비고 있다.   

 

 

♧ 입춘 날에는 - 박종영

 

옛적 기억나는 데로 식은밥이

가난을 눈물 나게 하던 시절에도

슬기로운 얼굴 쳐다보며 봄이오는 들판

허리춤 부여잡고 달려가지 않았더냐

 

이제는 들을 수 있는가,

언 손 녹이며 우리와 함께하려는

청아한 바람의 소리 그 뒤에 신비로운 무게로

솟아오른 연둣빛 촉순의 발그레한 웃음끼,

우르르 피어나는 날이 예서 가까운지라

 

나무와 나무 사이 제각기 흩어져 살아온

추운 언어들이 하나 둘 숲으로 들어서

아쉬운 고개를 조아리고,

비로소 겨울잠을 깨고 어두운 날을 환하게 웃는

노란 복수초 너의 꿋꿋한 장래를 위하여

 

오늘은 한껏 더운 힘을 모아

추운 겨울 몰아내자 팔 걷어붙이는 입춘 날,

이 강산 꽃물들인 저녁상 앞에 놓고

너와 나 목청 다듬어 다정한 들꽃 이름

막힘없이 불러보자.   

 

 

♧ 입춘 - 박인걸

 

분홍 빛 꽃잎이 흩날리던

바람 잦은 산길을 돌아

내 곁을 훌쩍 떠난 그대 소식에

아직도 애달프더니

 

눈보라 사납게 흩날리는

얼어붙은 강둑을 걸어

꽃 눈 틔우며 내게로 온다는

그대 소식에 설레는 마음

 

헤어지자는 말도 없이

아쉽게 가버렸지만

아직도 못 잊어 하는 마음

그대 어찌 알았을까

 

대문 활짝 열고 뛰어나가

플래카드 내 걸어 환영하며

그대 오시는 앞길을

빗자루로 쓸어 드리리다  

 

 

♧ 立春 - 강세화

 

겨울 가뭄이 너무 오래다

오늘이 하마 입춘절(立春節)인데

어린 가지에는 단물이나 오르는지

되는 일도 없고 안되는 일도 없고

전하는 소문마다 살만한 건 그예 없고

속앓이 풀릴 기미는 감감하고

바람도 가뭄타서 뒷길로 분다

오늘이 하마 입춘절(立春節)인데

겨울 가뭄이 너무 오래다   

 

 

♧ 立春 - 신지혜

 

먼저, 단전에 숨 한번 멈추고

여백이 꽉 찬 흰 화선지위에

듬뿍 묻힌 먹물을 꾸욱 누르는 듯싶더니

흰 우주 적막을 가늘게

찢으며 꽁꽁 숨었던 난초 잎 하나 툭, 트인다

 

드디어 난초 잎 하나 고개를 든다

얇은 화선지 음지에서

서로 엉키고 설켰던 구부러진 사족들,

날렵하게 이리저리 삐쳐 오른다

 

천 길 절벽에 이르러서는

일직선의 팽팽한 몸이 망설임도 없이

난창, 휜다 품 넓은

대기가 단숨에 넙죽 받아 안는다

 

천지사방,

수군수군 봄바람 일어선다

속울음 터지고 말이 터진다

참았던 자폐가 꽃망울을 단다

제 생의 암시와 여백 한 장을

철철 들었다 놓았다 한다

 

집 한 채가 숙연히 선다 

 

 

♧ 입춘예감(入春豫感) - 조영순

 

털 부시시한 새들과

짧디 짧은 뿌리로 온몸을 겨우 지탱한 마른나무들과

코끝에 송글송글 땀방울 맺힌 바람이 신나게 노는 아침

부드럽게 생명을 실어 나르는 히아신스 알뿌리 하나

쓸쓸한 겨드랑이 사이를 마구

비집고 들어서면

자꾸만 허전한 나목의 벼랑마다

제 몸 속에

도사린 어둠의 질긴 발목들

툭툭 자르며

꽃봉오리들 둥글게 일으키고 있다   

 

 

♧ 입춘단상 - 박형진

 

바람 잔 날

무료히 양지쪽에 나앉아서

한 방울

두 방울

슬레이트 지붕을 타고 녹아내리는

추녀 물을 세어본다

한 방울

또 한 방울

천원짜리 한 장 없이

용케도 겨울을 보냈구나

흘러가는 물방울에

봄이 잦아들었다.

 

 

♧ 입춘 - 정군수

 

입춘 아침

할아버지는 사립 문설주에도

햇발 안 드는 뒤안 장지문에도

입춘방을 붙이셨다.

응달에는 눈이 쌓여

할아버지의 흰머리만큼이나 근심스러운데

마른 가지는 겨울바람이 남아

할아버지의 손등만큼이나 앙상한데

입춘방을 붙이셨다.

둘러보아도 봄소식은 알 길 없고

풀 그릇을 들고 종종거리다가

나는 보았다

하얀 수염 사이

어린아이 같은 할아버지의 웃음

봄이 오고 있음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