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카 일기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김창집 2013. 2. 10. 01:10

 

 

1월이 지나고 2월이 왔지만

설날이 지나지 않으니

새해를 맞은 것 같지가 않았다.

    

그래서 

용이 슬며시 꼬리를 감추고

지혜로운 뱀의 머리가 나타나는

계사년 첫날을 맞는 아침에야

지난 1년 동안 열심히 드나든 분들께

홍매화로 세배를 드린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설날 아침에 - 김종길

 

매양 추위 속에

해는 가고 또 오는 거지만

새해는 그런대로 따스하게 맞을 일이다.

 

얼음장 밑에서도 고기가 숨쉬고

파릇한 미나리 싹이 봄날을 꿈꾸듯

새해는 참고 꿈도 좀 가지고 맞을 일이다.

 

오늘 아침 따뜻한 한 잔 술과

한 그릇 국을 앞에 하였거든

그것만으로도 푸지고 고마운 것이라 생각하라

 

세상은 험난하고 각박하다지만

그러나 세상은 살만한 곳

 

한 살 나이를 더한 만큼 좀 더 착하고

슬기로울 것을 생각하라

 

아무리 매운 추위 속에

한 해가 가고 또 올지라도

 

어린것들 잇몸에 돋아나는

고운 이빨을 보듯

 

새해는 그렇게 맞을 일이다. 

  

 

♧ 설날(214) - 손정모

 

자오선이 평소에 어디를 지나건

솔바람 소리에 깨어나는 산울림처럼

천체는 동에서 서로 기울기 마련이리라.

졸면서도 되풀이되는 타성의 발자취에

결코 이대로 둘 순 없다며

선조들, 지혜의 칼날 갈았네.

 

정월이 하필이면 겨울인 것은

춘삼월의 환희를 기약함일까?

강가에 드리워진 물안개처럼

내막 알 수 없을지라도

날 잡고 마음 가다듬어 여는

새해의 첫 날이여.

  

 

♧ 동심의 설날 - 박인걸

 

산촌의 그믐밤은

바람결에 나뭇가지가 울고

초가지붕에 몸을 숨긴

참새들 마져 떨고 있는데

 

눈썹이 셀까봐 날밤을 세운

철부지들은 가슴이 부풀고

십환짜리 세벳 돈 생각에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다.

 

질퍽거리는 눈을 밟으며

온 마을을 휘젓고

설의 의미는 몰라도

한 살 더 먹어 마냥행복했다.

 

늘화투 윷놀이

팔뚝맞기 노래 부르기

밤을 하얗게 새워도

여자 애들과 놀아 좋았다.

 

눈감으면 떠오르는

그 시절 그 마을

지금도 가슴 한 구석에

고운 그림으로 남아 있다.   

 

 

♧ 설날 아침에 - 김남주

 

눈이 내린다 싸락눈

소록소록 밤새도록 내린다

뿌리뽑혀 이제는

바싹 마른 댓잎 위에도 내리고

허물어진 장독대

금이 가고 이빨 빠진 옹기그릇에도 내리고

소 잃고 주저앉은 외양간에도 내린다

더러는 마른자리 골라 눈은

떡가루처럼 하얗게 쌓이기도 하고

닭이 울고 날이 새고

설날 아침이다

새해 새아침 아침이라 그런지

까치도 한두 마리 잊지 않고 찾아와

대추나무 위에서 운다

까치야 까치야 뭣하러 왔냐

때때옷도 색동저고리도 없는 이 마을에

이제 우리집에는 너를 반겨줄 고사리손도 없고

너를 맞아 재롱 피울 강아지도 없단다

좋은 소식 가지고 왔거들랑 까치야

돈이며 명예 같은 것은

그런 것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나 죄다 주고

나이 마흔에 시집올 처녀를 구하지 못하는

우리 아우 덕종이한테는

행여 주눅이 들지 않도록

사랑의 노래나 하나 남겨두고 가렴

 

 

 

♧ 설날 아침에 - 구재기

    -둑길行 · 58

 

모두 다 기쁜 마음으로

새벽같이 일어나

세수를 하고 설빔으로 갈아입고

차례상 앞에서 엄숙히 고개를 조아리는 데

사변 때 홀로 된 큰집 형수는 서럽단다

엊저녁 막 버스로 내려온 새댁은

붉은 입술에 꽃주머니를 허리에 차고

가벼운 걸음으로 사립문을 나서는데

채경 앞에 앉아 참빗질에 열중하여도

손뼉 치며 즐거울 일 하나도 없구나

마른 얼굴에 잔주름만 하나 더 늘었구나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서러운 이야기

뒤늦게 음복술로 마음을 다스려도

세상을 사는 것이 그렇게 고달프다

상기둥에 매달린 복조리의 거미줄을

쓸쓸한 가슴으로 털어내다 보면

오늘따라 헛것처럼 두려운 벽면의 두툼한 일력

어느새 회관 앞에서는 윷판이 벌어지는데

먼저 간 혼백이 그리워지는구나

고지먹은 논 한 마지기에 값을 정하여 모내기로부터 마지막 김매기까지 일해 주기로 하고 삯을 미리 받아 쓰는 것

논 위에 싸락눈이 내리는구나   

 

 

♧ 설날 아침 - 최진연

 

마당가 감나무 꼭대기를 비추는 햇살

그 햇살 쬐고 앉은 까치 한 마리

깍, 깍, 깍, 깍

꽁지 까딱이며 깃을 털 때마다

떨어지는 발간 햇살 부스러기들

깃털 무늬 아롱진 축복의 씨앗들.

까치와 새해 인사를 나누려는지

설빔을 차려 입은 한 아이

방문을 열고 뛰어나가 본다.

 

동그래진 눈 속으로 빨려드는

하얀 봉당 끝, 하얀 마당

무럭무럭 김을 뿜으며 소죽을 먹는

외양간 지붕에도 소복 눈 덮인 풍경들

까치는 그 새 어느 집으로

기쁜 소식을 전하러 날아가고

새파란 하늘을 인 앞산 머리 위로

아침 세수한 해가 솟아오르는데

앞집은 아직도 떡국을 안 먹었을까?

용마루가 묻힌 그 집 지붕 위로

하얀 연기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게.   

 

 

♧ 그해 설날의 전설 - 김영언

   -한리포 전설 9

 

  세월두 참,

  그전 같으면 온 동리가 시끌벅적 헐텐디 흰 두루마기 정갈허니 차려입고 집안 맨 웃어른 앞장서고 식솔들 내리 줄지어 해뜨기 전에 제일 먼점 조상님네들 산소 갔다 오고 노인네들 계신 집마다 정초 문안 여쭙는 세배꾼들이며 집집이 돌며 덕담 나누는 술꾼들 무리 옥빛 남빛 곱살스레 바지저고리 차려입고 신작로마다 발자국들 왁자허니 줄 이을텐디 인젠 설두 설같지두 않구 그나저나 이놈의 동네가 어디 사람 사는 디 같어야지 육지대로 떠나 버린 빈집들만 여기저기 음산허고 그나마 남어있다는 건 죄다 꾸부정헌 늙은이들뿐이니 게다가 해마다 하나둘 세상 뜨다 보니 명절이라구 도회지 나간 자식새끼들 내려오는 집두 두서넛뿐이고 에이구 설두 이젠 다 옛날 얘기지 늙은이가 뒤주 위에 메 한술이라두 떠놓는 게 어디 여간 애성스런 일이어야지 세상두 참 요상허지 철두 제대루 모르는 예닐곱에 시집와서 이렇다 하게 부쳐먹지두 못 헐 오죽잖은 땅뙈기나마 후벼파고 철철이 산으로 갯기슭으로 기대질치며 극매느라 손톱 한번 제대로 자랄 틈 없이 허구헌날 고단허니 엄동설한 같은 시부모 모시고 온갖 시집 다 살면서두 그래두 하나 믿고 의지할 건 올망졸망한 저 자식새끼들뿐이라고 입은 거 벗어 내주고 입안에 든 것이라도 단것이면 뱉어 내 먹이며 길러 너희들만큼은 절대로 이 지긋지긋헌 세상 대물림하지 말고 남대두 좋은 세상 떵떵거리며 살아야 한다고 가슴팍 살점 도려내듯 도회지로 살림 내주었더니 이제 와서는 며느리 시집이라니 참말 거꾸로 흐르는 세월이여 한해를 통털어 고작 서너번 무슨 일 때나 잠깐 다녀가는 요샌 며느리가 며느리가 아니라 손님이라고는 허지만 애들 사는 도회지는 밤낮 무슨 일이 그리도 많은지 회사에갑자기일이생겨서애기아빠가비상근무래요너무서운해하지 마 세 요 어머니 서운허긴서운허긴뭐다괜찮다세월이그런걸 어 쩌 겠 니 자식들마저 안내려오니께 그 흔허던 술꾼 하나 언뜻도 않네 허긴 예전 같으면 보리막걸리나마 밑바닥까지 닥닥 긁어내던 열 말은 실히 넘을 저 큰 술독 거미줄 친지 오래건만 아니할아배는왜저기전화기옆에꺼내논새한복두루마기안입었어요설에입으라고지난번에올라갔을때큰애가해준건데새옷은입어뭐해눈이나좀치울까웬눈은이리도많이쌔이나아올사람도없는데눈은치워뭐해요그래두혹누가오기라도하면……

 

  아무도 오지 않은 그해 설날

  단단히 얼어붙은 신작로를 따라

  마당 가득 전설 같은 함박눈이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