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샘추위를 넘은 말들
어제, 묘제를 끝내고 제일 늦게 내려오는 길
그제 그 모진 비바람을 이기고
목장에서 풀을 뜯는 말들을 만났다.
그 모습이 너무 대견해 보여
차를 세우고 가까이 다가갔다.
그런데 나의 마음을 알아주었는지
아니면 카메라를 의식했는지
갑자기 동서쪽으로 내달리며
보아란 듯이 뛰어다닌다.
아! 저 대견스러운 것들,
아무리 바빠도 주위를 보고 다니라는 듯이….
♧ 꽃샘추위 - 권오범
겨우내 초목들 기절시켜놓고
끗발 날리던 동장군이
떡고물 구경도 못한 채
공연히 감투 벗으려니 억울했나보다
그러잖아도 미련이 남아 무르춤하는 사이
목련이 정분나 허튼 수작 부리지요
봄에게 물벼락까지 맞고 나니 성질나
돌아서 칼바람 콧김으로 발악하는 3월 한복판
세세연년 오지게 당했으면서
작년보다 여남은 날 앞당겨 깬 걸 보면
조명 발 잘 받는 꽃나무들은 시건방져
건망증이 심한 걸까,
밤새 말달리며 족대기는 바람에게
나무아미타불 될 건 뻔한 일
철없이 서두른 것이 죄겠지만
겔러터져 미적미적한 봄, 네 책임이 더 크다
♧ 아, 고구려 - 강태민
아름다운 이 땅이
민족이 전생에 말달리던 국토였구나
아름다움이
그저, 그냥 아름다움 아니라
국토를 수호해 머무는 민족혼 다르고
송화강 물결 위 흐르는
꽃잎의 향내가 이방과 다르질 않는가
세월이 흐르고 흘러
비통한 침묵
잠을 자던 웅혼 깨어나고
역사의 권태로운 시간 지나면
고구려의 이름은
오랑캐 기억하리
만주벌 평원 위 유창한 말굽소리
중원 평 천하
민족의 웅진이고
불멸 불사 민족이 낳은 영웅
광개토대왕 칼날 앞에
사라지는 무리 가랑잎이니
썩은 풀뿌리 한갓 오랑캐
온전하게 묘 쓰지 못하도록
푸른 칼로 베어내리
민족의 역사 탐하려는
비대한 가랑잎
중원 무리의 실수를
절대
용서치 않으리.
♧ 우리 집 그 양반 - 김종제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우리 집 그 양반
아직 젖비린내 가시지 않은
봄 새벽에
빼앗긴 집에서 쫓겨나
몰래 기차 숨어타고
만주벌판으로 가야했다는
그 양반
책속에만 나오는
고조선처럼 고구려처럼
그곳에서 말달리며
총 쏘고 칼 휘둘렀다는 그 양반
장마로 축축하게 젖어
다 허물어져 가는
여름 한낮에 돌아와
서까래 놓고 기둥 일으켜
다시 집 우뚝 세워놓았다고 하는
그 양반
그 옛날 아버지처럼
우직한 소 끌고가
논으로 밭으로 흙 갈고 있는 그 양반
과수원 나무에
가지치기 하는 그 양반
곡식 잘 자라고
열매 잘 익었으니
이제 잘 키워놓은 가을을
추수하는 그 양반
다가올 겨울과 싸움을 준비라는
우리 집 그 양반
♧ 잃어버린 왕국 - 임영준
태평양건너에서 바라보니
억울하게 천년을 떠돌고 있는
잃어버린 왕국이 또렷이 보인다
지워진 역사의 장에서
화석으로 통곡하는 조상들이
대륙의 거침없는 야욕과
하루하루가 힘겨운 후손들이
극명하게 대비되는 것을 지켜보는데
어찌 영면할 수 있으랴
호쾌하게 말달리고 일구어
겨레에 새겨놓은 북방의 영토를 두고
수복은커녕 눈치만 보고
몸 사리고들 있으니
앞날이 심히 걱정스럽구나
과거를 외면하면 미래도 없는데
제 족속들의 영달에만 급급한 미물들이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앞뒤분간을 못하고 있구나
아 ! 요원하기만 한 천년의 왕국이여
우리들의 염원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