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詩 5월호와 노랑꽃창포
생명과 자연과 시를 가꾸는 ‘우리詩’ 5월호가 나왔다. 먼저 소설가 양선규 교수의 우리詩 칼럼 ‘새와 짐승과 초목의 이름’으로 시작하여 ‘신작시 28인선’은 임보 윤석산 장문석 박수완 김영호 김승기 고종목 김금용 남유정 홍예영 이정원 마경덕 김옥전 고미숙 김병휘 정윤수 조경희 김남수 이종섶 박동남 임미리 배옥주 권혁수 홍우식 김유섭 채영선 김도연 신경희의 시를 실었다.
‘신작 집중 조명’은 김석규의 ‘귀거래’외 4편과 나병춘의 ‘복수초’외 4편을, 그리고 '우리詩 신인상' 당선작을 발표하고 당선된 오명현의 ‘질투’외 4편, 조봉익의 ‘아버지’외 4편을 당선 소감과 함께 실었다. ‘이달의 산문’은 윤혜선의 ‘아카시아 피는 5월에’와 퇴허자의 ‘대통령이란 무엇인가’, 끝에 한시한담 조영임의 ‘독서광 김득신과 취묵당’을 올렸다. 앞에서 시 8편을 골라 노랑꽃창포와 함께 싣는다.
♧ 한평생 - 임보
소주 몇 병 비우고,
영화 몇 편 보고,
꽃구경 몇 번 하다 보니,
어느덧 석양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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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S. 엘리엇은 커피 스푼으로 인생을 쟀다지만 나는 소줏잔으로 인생을 폈다.
♧ 정년 - 윤석산
정년은 마침표가 아니다.
한 번쯤 쉬었다가 숨고르고
다시 가라는 쉼표.
누가 말했던가
음악이 아름다운 건 쉼표가 있기 때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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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민 스님의 말씀 인용
♧ 낙타의 눈빛 - 김영호
낙타의 눈빛 속에 사막이 있다.
찬바람이 우는 사막
검은 구름이 지나가는 사막
그 사막이 있는 낙타의 눈빛 속에
그리움의 엄숙한 공허
기다림의 견고한 허망이 짙다.
이국의 써커스단에 팔려온 유랑자
그 비참한 숙명에 눈물도 말랐다.
사철 해가 기침을 해 대는 낙타의 눈빛 속에
사막 같은 한 사람 서 있다.
길 없는 사막
집 없는 사막
친구 없는 사막
애인 없는 사막
캄캄한 사막 같은 사람이 서 있다.
♧ 봄비와 전차 - 김금용
누가 창을 두들긴다
레몬이 노랗게 그려진 우산을 쓰고
60년대에 사라진 카키색 전차를 함께 타잔다
베토벤 첼로 소나타 3번에 맞춰
딸그락거리는 전차 길에 박자를 맞추는
3월 봄비와 팔짱을 끼고
서귀포 자구리 해변의 이중섭 거리로 가잔다
화가 이중섭이 그의 부인을 기다렸던
섶섬이 내려다보이는 노천카페에 앉아서
나도 유채꽃을 들고 배에서 내릴 누군가를 기다려볼까
어쩜 인적이 드문 노천카페에 혼자 앉아
식은 커피를 마시는 내게 달콤한 설탕 한 스푼
넣어주며 바다가 대신 날 챙겨줄지도 몰라
바다를 건너뛸 배표도 여행가방도 없는
적당히 쓸쓸하고 헛헛한 외지인들에게
봄비와 베토벤 첼로 소나타 3번을 주머니에 넣어주며
가족들과 나신으로 뒤엉켜 뛰놀던 이중섭의 바다라고
천진난만한 아이 목소리로 날 불러 세울지도 모르지만,
노천카페 낡은 스테레오에서 흘러나오는
돈.죠바니의 피아노음이 떠나는 전차를 불러세운다
봄비와 나를 태운 전차지붕을 두들긴다
♧ 먼 길 - 남유정
당신이 걸어온 길이
숲으로 들어간 후
찔레꽃이 피고
뻐꾸기가 울고
나는 그 숲에 들어갈 수 없었다
당신이 꽃잠을 잘까 봐
당신이 꽃잠을 깰까 봐
♧ 황토현 - 김병휘
사발 속에 새 하늘을 담는다
풀꽃들의 별빛 문자들의 뜨고 있다
파아란 들녘에 맑은 물소리 들려오는 곳
바람 지나간 자리에 우거진 풀들이 동쪽으로 쓰러져 있다
가지 뚝뚝 꺾어진 감나무가 박제처럼 서 있는 황토현
녹두꽃 울음을 하늘에 건다
♧ 꽃망울 여는 것은 - 정윤수
속병 난 그리움의
생채기들이
가슴 한구석 어두운 곳에
옹아리져 있다가
꽃샘바람에
지쳐버린 잔설이
꼬옥 다문 입술에 따스하게 포개져
파리한 가슴을 녹이면
촉촉한 눈물 온몸에 번지고
싸늘하게 식었던
첫사랑이
뜨겁게
뜨겁게
솟아오르는 것.
꽃망울 여는 까닭입니다
♧ 가릉빈가 - 조경희
내가 그대를 그리워하다
이 한생 다하고 다시 태어난다면
극락정토(極樂淨土) 설산(雪山)의 가릉빈가가 되고 싶어
그대는 어느 깊은 산길을 걷다 우연처럼
맑은 목청으로 우는 새의 노래를 듣게 될 거야
새의 노래에 마음을 뺏긴 그대는
그 새의 깃털에 다시 한 번 마음을 뺏기게 될 거야
꿈결처럼 넋을 잃은 그대가 마냥 새를 쫓다
길을 잘못 든 것처럼 어느 작은 산사에 들었을 때
그대는 달빛 어린 연못에 비친 반인반수(半人半獸)
내 모습을 만나게 될 거야
불꽃이 활활 타오르고
가릉빈가의 선율에 취한 그대가
전생의 내 이름을 떠올리며 곡진히 울 때
나는 타오르는 불 속으로 뛰어들고 말 거야
알이 부화하듯 천년의 시간이 다시 깨어나고
닫혔던 시방세계에 가릉빈가의 노래 울려 퍼질 거야
풀지 못한 인연의 매듭 노랫소리에 풀릴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