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카 일기

때죽나무 꽃이 피어

김창집 2013. 5. 14. 00:17

 

집 앞 소공원에

때죽나무 꽃이 왁자지껄 피어있는 모습이

창문 너머로 보여

아침에 운동복 차림으로 뛰어가

더러 떨어져 버린 꽃들을 보며

한 발 늦은 걸 후회했다.

 

오늘 방송을 보니까

하루 종일

미국 가서

절제해야 할 술을 마시고

엉덩일 만졌다거나

허리를 툭 쳤다는 둥 왁자지껄이다.

 

남의 말은 하기 좋다고

인사 청문회 이후 잠잠했던

출연료 깨나 받는 해설자들

제 세상 만난 듯

신나서 야단들이다.

 

아아

말 많은 나라에서 사는 일이

이렇게 피곤할 줄이야.

 

 

♧ 때죽나무꽃 - 이광석

 

온갖 봄꽃 다 진 자리에

밥풀처럼 주렁주렁 매달린

때죽나무꽃

외할머니는 저 희디흰 꽃잎으로

하이얀 쌀밥을 지어 내셨다

새들이 휘파람으로 불러모은

5월의 푸른 들판에

거짓말처럼 내린

설화雪花

외할머니 옥양목 치맛자락

때죽나무 가지마다

눈부시다 

 

 

 

♧ 때죽나무꽃 - 안재동

 

봄이 한창 무르익어 갈 즈음

때죽나무에 활짝 핀 무수한 하이얀 꽃들이

그 순백의 꽃들이 하나같이

땅바닥만 바라보며 웃고 있다

 

따사로운 햇살을 한 점이라도 더 받으려는 양

어쩌면 세상에서 제멋만이 최고인 양

그도 아니면

푸른 하늘에 앞다투어 얼싸 안기려는 양

가지가지 색깔과 양태로 요란하게 분단장한

세상의 여느 꽃들과는 딴판이다

때죽나무꽃에 그 연유를 물었더니

단 한 순간도 땅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려

애쓰면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가로등에 물어보라고만 한다   

 

때죽나무꽃의 주문을 헤아리려

땅거미가 온 거리를 삼킨 뒤의 저녁 무렵

가로등에 바짝 다가섰으나

고개를 쳐들고 바라만 보고 섰다가 조용히

돌아서고 말았다

그렇게, 사람은 가로등을 만들지만

고장 나기 전까진 그 존재를 까맣게

잊고 산다

어쩌면 때죽나무꽃과 가로등의 심정으로

지금 나를 바라보는 존재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가끔

땅을 바라보며 걷는 것이 즐거울 때 있다

 

세상 모든 꽃들이 하늘만 바라보는데

때죽나무꽃이 아니라면

어느 꽃이 맨땅에 눈길 한번 줄 것인가

제 얼굴의 아름다움도

땅에 의지하고 있는 제 뿌리 때문임을

꽃들은 알기나 할까?

땅은 때죽나무꽃더러 이른다

세상 그 어느 꽃보다 수더분한 이름이여

그 어느 꽃도 비할 수 없는 참빛의 얼굴이여

갈수기의 단비처럼 고마운 존재여

순박의 사랑이여   

    

 

 

♧ 뜰과 귀 - 오규원

 

  뜰의 때죽나무에 날아와 있는 새와 지금 날아온 새 사이, 새가 앉은 가지와 앉지 않은 가지 사이, 시든 잎이 붙은 가지와 붙지 않은 가지 사이, 새가 날아간 순간과 날아가지 않은 순간 사이, 몇 송이 눈이 비스듬히 날아내린 순간과 멈춘 순간 사이, 지붕 위와 지붕 밑의 사이, 벽의 앞면과 뒷면 사이, 유리창의 안쪽 면과 바깥 면 사이, 마른 잔디와 마른 잔디를 파고 앉은 돌멩이 사이, 파고 앉은 돌멩이와 들린 돌멩이 사이, 대문의 안쪽과 바깥쪽 사이, 울타리와 허공 사이,

 

  허공 한 구석

  강아지 왼쪽 귀와 오른쪽 귀 사이   

 

 

♧ 비밀 - 이길원

 

   이건 아내도 모르는 일이야. 내가 이른 새벽 용왕산에 오르는 이유를. 운동 삼아 가는 줄 알지. 하지만 사실은 이야기 묻으려 가는 걸세. 주름지고 처진 살결 양복 속에 감추고 지낸 어제가 아닌가. 아내에게도 차마 할 수 없던 이야기를 아카시아 꽃잎에 얹으려 가지, 가령 말일세. 판사 앞에서 조아리고 싶어 안달이 난 시인들이나 정치인처럼 호령하며 편 가르는 문인들 있지. 시인이라고 안경 걸치듯 내세우는 소리 가만 듣고 있다가 뒤늦게 상수리나무에 대꾸하려 가지. 실성한 사람처럼 말이야. 혹 참았던 눈물이 있다면 때죽나무 잎에 걸어놓고 온다네. 그렇게 이야기를 묻고 오면 시원하단 말이야. 자네도 한번 해보게. 피곤하게 소리치며 남과 싸우지 말고. 누가 그랬지? 이길 것도 질 것도 없는 세상이라고. 시인이 부끄러울 때가 너무 자주 있네.  

 

 

 

♧ 직소폭포 가는 길 - 정영경

 

 나 몹시 외롭거든 내변산 직소폭포 갈대 무덤길로 갈 것이다 황백색 붉나무랑 한나절 붉어지다가 남몰래 신들림을 당한 신나무 되어 보리라 장구밥나무의 장구를 빼앗아 놀다 쥐가 똥을 싸서 무릎팍이 헐어버린 쥐똥나무 아래 슬쩍 실례도 해보리라 질감이 좋고 향이 기가 막히는 까마귀베개 꽃잎에서 한숨 자다 보면 공작꼬리 흔들며 자귀나무 날 깨우리라 복사나무 그늘에선 복사꽃을 꿈꾸면 안 된다고 꽝꽝 나무 온몸으로 꽝꽝대리라 더러 수려한 수리딸기 잎 지어 누워있는 바로 그 옆에 숨어 있다가 덜꿩나무 엉덩이에 박혀 있는 밑구멍에 똥침을 가하리라 아직은 안 된다 배꼽을 숨겨 앙살 떠는 팥배나무 배꼽도 벗겨 보고 때가 많아 발발이 휘어져 있는 때죽나무 등딱지도 밀어 주리라 다리 꼬인 합다리 나무와 아서요 아서요 손 저어 나무라는 서어나무 그러다 작살난다 벼르는 작살나무 정주면 가슴에 금이 간다 찌어대는 정금나무 모두 저 샛길 담장 아래로 유혹하리라 이도 저도 싫으면 푸레 푸레 눈두덩이 우물진 물푸레나무에 주저앉아 봉래곡 암벽단애 사이 떨어져 내리는 실상용추 물이 되어 흘러가 볼 거이다 분옥담에 엎드려 딱 한번 울음 되어 너를 불러 볼 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