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향기

김광렬의 시와 섬초롱꽃

김창집 2013. 6. 4. 06:27

 

섬초롱은 초롱꽃과에 속한 여러해살이풀로

줄기는 자줏빛이 돌고,

뿌리에서 나오는 잎은 잎자루가 길며,

줄기에 달리는 잎은 잎자루가 짧아지다가 없어진다.

6~7월에 연한 자줏빛 꽃이 피는데,

우리나라 특산종으로 울릉도에 분포한다.

 

지난번에 소개했던 김광렬 제3시집

‘그리움에는 바퀴가 달려 있다’를 펼쳐

시를 읽다가 너무 좋아서

몇 편 사진과 같이 내보낸다.

 

 

♧ 소가 웃는다

 

오름 오르는 나에게

길게 하품하며 소가 웃는다

 

너는 늘어지게 풀을 뜯어본 일이 없지

게으르게 풍경을 즐겨본 일도 없지

느긋함이 아름다움인 줄 모르지

 

오자마자 한번 쓱 훑어보고는 떠나는 인간

차를 타고 뿌옇게 먼지 일으키며 와서는

쫓기듯 부랴부랴 되돌아가는 인간

목을 빳빳이 세우고 가슴은 새처럼 떨며

마음은 늘 세속에 갇힌 속물

그렇지, 맞지

 

입 걸쭉하게 하품 궁굴리며

세상 일 잊은 듯 선한 눈을 뜨고

소가, 풀잎 속에서

한없이 느릿느릿 웃는다   

 

 

♧ 그리움에는 바퀴가 달려있다

 

그리움에는 바퀴가 달려있다

덜컹덜컹, 때로는 미끄러지듯

내가 닿고 싶은 곳으로 데려다 준다

그리움이 짙으면 짙을 수록

바퀴가 굴러가는 속도는 빠르다

어느새 내가 가고 싶은 곳에 닿아 있다

너는 모르지 너의 곁에 내가 있는 것을

지금 바로 출발한 내가

너의 손에 편지처럼 들리어져 있는 것을

이별이 바퀴를 굴리며 떠나가듯이

그리움도 바퀴를 굴리며 떠나간다

이별이 우리를 갈라놓았지만

헤어졌다고 그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리움으로 슬픔을 덮으며 살기도 한다

그리움에는 바퀴가 달려 있어서

늘 너에게로 떠날 수 있어서

이별은 있어도 좋다  

    

 

♧ 사월은

 

사월은 낫 같은 초승달을 들고 산으로 간

그의 아버지가

죽음을 당한 달

 

사월은 그물 같은 세월을 빠져나가지 못한

그가

신음하는 달

 

사월은 바람에

돌에 허공에 미쳐

제 머리를 짓찧어댄다     

 

 

 

♧ 진혼곡(鎭魂曲)

   - 4.3 유해 발굴 모습을 바라보며

 

슬퍼하지 마라

누구나 상처를 껴안고 살아가느니

찢긴 저 풀잎도 제 상처 보듬어 안고 살아갈 것이니

별빛 치렁치렁한 밤 캄캄한 흙더미 속에서

잉잉 울고 있는 원혼들아

원통하다 원통하다고

삭은 뼈 긁으며 괴로워하지 마라

이 지상의 불꽃이었던 것들은 모두 재가 될 것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 물이 되어 흐를 것이니

때 이른 승냥이 같은 바람이 할퀴고 갔을 뿐이니

한 줄기 미친 소나기가 퍼붓고 갔을 뿐이니

바람칼 맞아 뚝뚝 떨어지는 꽃잎이었을 뿐이니

그러므로 그대들,

막 동터오는 아침햇살 한 자락씩 베어 물며

찬란한 이슬길 걸어 극락정토로 잘 가라

가서, 아름다운 넋으로 다시 살아나라 

 

 

♧ 강정에서 온 편지

 

꽃잎 닮은 연서였으면 했어

꽃물처럼 달콤하지 않았지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어

한바탕 바람이 불어오고

단추를 잠그지 않아서

등 뒤 옷자락이 둥글게 부풀었지

쓰러지지 않으려고

힘껏 옆 바윗돌을 움켜쥘 때

크게 뒤채는 네가 보였어

이제 칼이 너의 몸에 스미고

본디 모습을 바꿔버릴 거야

너는 늘 그 자리에 있겠지만

진짜 너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깨달을 무렵 나는

서랍 깊은 곳에서

슬픔만 만지작거리고 있을 거다

 

 

♧ 강정리 바다에서

 

그가 막사발에 담긴 통김치를

여러 가닥으로 좍좍 찢어서 주는 것은

이처럼 해체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인가

그저 단순한 정감의 표현인가

부엌칼로 보기 좋게 자박자박 썰지 않고

손으로 좍좍 찢어 먹는

김치의 그 깊은 속맛, 그 온정이

못 견디데 가슴 안으로 스며드는데

그러면서 우리가 저처럼

찢겨서는 안 된다는 것도 더불어 깨닫는데

김치여, 생살 찢겨서

아픔과 황홀함을 동시에 주는 김치여

강정 앞 바다가 너희처럼

찢겨나갈 것을 생각하면

참담하다, 방금 찢어낸 김치 여기에 없듯이

저 고운 풍경들도 곧 지워져버리겠지

사라진 뒤 누가 다시

정겨운 옛 모습으로 되살릴까?

 

 

♧ 북소리

 

  찢긴 북에서는 더 이상 북소리가 나지 않았습니다 두드리면 금가는 파열음만 사납습니다 언젠가는 찢기리라는 예상을 전혀 못한 것은 아니지만, 설마가 현실이 되고 벌어진 아가리는 온통 검붉은 피를 흘리다 못해 슬픈 고름냄새를 매달았습니다 건재했던 시절의 소리가 둥둥, 그리워졌습니다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시간, 시간들이 서슴서슴 흘러가자 내 안 저 어느 골짜기에서는 웬 북소리가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북소리가 끝났다고 내 안의 소리마저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내 안 어느 곳에 북소리는 낮게 물 흐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끝이라고 생각하는 찰나, 북소리는 막힌 벽을 뚫으며 다시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끝은 새로운 시작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