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카 일기

망종에 보내는 붉은병꽃

김창집 2013. 6. 5. 06:38

 

5월 마지막 일요일

한라산 윗세오름에 영실로 갔다가

아직도 남아 있는 붉은병꽃을 봤습니다.

꽃이 핀지 좀 되었고

똑딱이로 찍었지만

그래도 올려 봅니다.

 

오늘은 망종(芒種).

망종은 일 년 중

논보리나 벼 등의 곡식의 씨를 뿌리기에

가장 알맞다는 날로

이십사절기의 하나입니다.

 

주변에 아직도 보리를 베지 않은 밭이 있던데,

많은 식구들이 먹고 살려고

엄청나게 많은 보리를 수확하던

어린 시절이 생각나네요.  

 

 

♧ 6월의 표정 - (宵火)고은영

 

늦은 밤 달무리 진 하늘을 본다

의미도 모르는 슬픔이 열린다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가없는

도회의 빌딩들

 

인생을 건넌다는 건

의식 안에 배설되지 않은

외로움의 담담한 침묵을

통증 없이 받아 드리는

또 다른 통증의 쓸쓸함이다

 

낮에 하늘을 구르던

무표정한 구름에

벌써 유월은 소리없이 각인되어

슬며시 미소 짓고 있었다

 

시간을 입고 누운 유월은

침대에서 바라본

밤의 얼굴보다 더욱 환하다

    

 

♧ 芒種망종 저녁 - 하종오

 

상수리숲 솔숲이 산그림자를 따라 옮겨다니다가

산그림자를 거두어서 그윽하게 산정에 오른다.

찔레나무들은 희디흰 꽃을 뿜어내며 마을로 가서

홀로 밥 끓여 먹는 홀어미 집 울타리 되어 둘러서고

자드락길들이 무너지면서 비탈밭으로 몰래 들어간다.

그걸 보고 물에 잠긴 논 한 배미 두 배미 울렁거린다.

이윽고 산을 넘어오는 어스름에 곤충들이 자취를 지우고

종일 일한 괭이 호미가 흙을 털고 스르르 넘어진다.

이 저물녘, 독주 마시고도 허언하지 않고 귀가하는

한 사내도 있고 가출하는 한 사내도 있고……

개구리들이 이 세상 순한 소리를 단번에 낸다.   

 

 

♧ 유월이 쓰는 시 - 권오범

 

꽃에 흠뻑 취해 겔러터지게 습작하다

가뭄 때문에 때 놓친 논배미 여백 나 몰라라

성글게 드리워진 버들주렴 하늘거리는 틈타

소리 소문도 없이 떠난 봄

 

어수선한 본바탕 그대로 놔둔 채

노련미로 은유 강조해

싱그럽게 퇴고하다 보니

조금씩 생기발랄해지는 이야기들

 

작년 가을 머리 푼 뒤

꼿꼿이 선 채 유체이탈 한 갈대

진부해도 지울 수 없는 고집스런 언어들은

지치면 알아서 사그라지겠거니

 

망종 보폭에 맞게 태어나

키 재기에 여념 없는

참한 언어들만 골라도

오만 이미지가 무작스럽게 하늘 찔러

 

 

 

♧ 가슴 가득 청보리가 - 이은별

 

산책길 보리밭이 온통 파랗다

진녹색이 물결치듯

처녀 시절 내 유월의

가슴속이 꼭 그랬듯이

 

산 너머 외할머니댁

굽이굽이 황톳길 따라가자

거기 보리밭 이랑에서도

아지랑이 피어오르고

어미염소와 아기염소가

한가로웠다 망종날에

 

길섶에 쏟아지는 햇살에

호반새의 노랫가락 맑아

그림을 그린다, 청보리밭

유월의 수채화를 떠올린다

 

이십 년 전의 나를 그렸다

사랑 무늬가 진녹색으로 돋보였다

내겐 아직도 가슴 가득

청보리가 자라고 있었다.   

 

 

♧ 어린 왕자 - 김형효

 

채찍을 든 바람 부는 아스팔트

헤드라이트 켠 자동차는 바쁘다

형광불 아래 창 밖 내다보며

그리운 그림을 본다

망종도 지나고 탈곡도 끝난

보리밭에 고사리 손들은

옆으로 나란히 나란히

공책을 펴듯이 이삭을 줍는다

 

그 들녘에서 꼴망태 부리며 이삭줍던 나는

톰소여도 동무농장도 읽어보지 못했고

바지 가랭이 흙발로 묻히며 살았다

지금 나는 그 밭두렁에

살 꿈으로 일어나고

희미한 달 기우는 새벽녘

별똥별은 추억 뒷켠에

은은한 입맛으로 살아난다   

    

 

 

♧ 6월의 현혹(眩惑) - 초희 윤영초

 

밀려오는 구름사이로

가슴 떨림같은 바람이 불고

싱그러운 유월의 지붕들이

한나절 일광욕을 즐기듯

따사로운 햇살에 눕고

초여름의 문이 활짝 열린다

 

다가오는 유혹이

하얀 속살태우듯

햇살이 익어간다

지나가는 발걸음

그림자로 길게 누워

애틋함으로 물들어

눈부신 유월은

뜨거운 현혹(眩惑)이다

 

살랑이는 미풍으로

녹음의 손을잡고

근사한 몸짓

왈츠를 춘다

나뭇잎 사이로

파랗게 파랗게 멍들어

푸른 강물로 출렁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