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카 일기

뜰보리수 익어가는 단오

김창집 2013. 6. 13. 00:03

 

무엇이 그리 바쁜지

이웃집 뜰보리수 다 익어

따 먹어버린 줄도 모르고

어느 날 문득 생각이 나

주섬주섬 사진기 챙겨들고 가보니

아무 것도 없었다.

꽃 피었던 흔적도

매달렸던 흔적도

그래 그게 그렇게

세월 가는 줄도 모르고 산 거다.

 

지난 주 토요일

해남 두륜산에 가다가

저녁 먹은 집 식당엔

이게 이렇게 이제야 익어가고 있었다.

단오가 다가오는 줄도 모르고….  

 

 

♧ 보리수 밑을 그냥 지나치다 - 한혜영

 

 

가로등 너는 아득한 전생에

보리수나무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뜨거운 발등 앞에 가부좌를 틀고 있는

석가를 물끄러미 굽어본 적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다

고요히 흘러 넘치는 그의 뇌수를

딱 한 방울 맛본 힘으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여기까지

걸어왔는지 모를 일이다

 

가로등 황금열매가 실하게 익어 가는 밤

설령 네가 그 날의 보리수였다고 해도

기대하지는 마라

이 시대에 누가 네 앞에 가부좌를 틀고

부처가 되려고 하겠느냐?

너를 붙들고 오열하다가 발등

왈칵 더럽히는 석가들이 있을 뿐,

어쩌다 심각한 표정으로 혼자 가는 중생

있다손 치더라도

그는 전생에 너를 몰라보고 끄덕끄덕

보리수 밑을 찾아가는 중일 것이다   

 

 

♧ 단오(端午)날에 - 박종영

 

내 누님 창포물에 몸 씻고

수리취 비녀 삼단 검은머리에 꼽아

일곱 무지개 색동옷 입었으니

선녀 가슴 강물로 넘치겠네

 

누구에게 망설일까

앵두입술 사르르

수리 떡 꿀맛일 때

오월 노랑창포 쟁반에 담아 이고

어느 임 유혹으로 휘날리는가   

    

 

 

♧ 단오 풍경 - 槿岩 유응교

 

오월 초닷새

양기 돋는 한나절

창포물에 머리감는

요염한 아낙네

젖가슴도 훔쳐보고

 

청청한

나뭇가지아래

그네 타는

바람난

여인네의 아랫도리도

숨어서 보고

 

짚신 털어 신고

텁텁한 막걸리 한 잔 걸친 뒤

번득이는 속임수와

잃고 따는 야바위들의

틈 속에서 나도 함께

속임수를 쓰고 싶구나.

 

누런 황소 냄새나는

사내들끼리

괴춤을 틀어잡고

힘겨루기 하는

씨름판도 기웃거리고   

 

 

♧ 五月 단오 - 서지월

 

지금은 꽃가마처럼 잊혀져 가는

훈풍 혹은 빨랫줄같이 되고 있지만

춘향이 옥비녀 뿐만 아니라

춘향이 눈썹 너머 피어오르는

환한 석류꽃 그늘로 해서 옵니다.

창포에 머리 감고

우리 누이들 착한 누이들 속살 내보이며

그네 뛰었고요,

남정네들 씨름하고 풀쌈하고

대추나무 시집 보내는

그런 단옷날

우리 엄만 날 낳으시고

이 세상에 나는 버려졌지요.

할아버지 돌아가신 喪中이라

服을 입은 아버진 두건(頭巾)을 쓰고 계셨고

그래서 내 이름을 건식(巾湜)이라 지어 불렀답니다.

마침 그때 두루 마을을 돌아다니며

참기름 파는 참기름장수 할머니 참기름 팔러 왔다가

곧 출산할 때 된 울엄마 배를 보시고

그날따라 우리집에서 하룻밤 묵고

세상밖으로 어린 나를 받아내었답니다.

미역국 먹고 떠나신 그 할머니

죽었는지 살았는지 그리고는 다시 오지 않더라는

지금에 와서 어머니께서 들려주시는 말씀,

중학교 1학년 국어선생 되어

교과서의 <오월단오> 학생들에게 가르치기도 했지만

마을을 떠돌던 그 참기름장수 할머니

내 아직도 못 가본 금강산처럼

그리워요.   

 

 

 

♧ 신밭골 이야기 - 권경업

 

품고 간 배내 염소

덕산장에 제 새끼 떼어놓은 듯

사십리 흙바람길 자꾸 허정댔다

 

새참만큼 길어진 해거름

대원사 어귀 개여울은

둥둥 걷인 발목보다 가슴이 더 시렸다

 

비린내가 오른 저녁상

상머리 다소곳 궐련 한 보루

"우와 이거 필터 담배 아이가"

 

덤덤한 민씨 기뻐 반기자

오봉댁 물기 어린 목소리는

그제야 겨우 웃음이 돌았다

“올해는 왕등제 묵정밭에

승검초와 황기를 갈고

조개골에 표고버섯 놓읍시더

가끔, 등산객 새재를 넘어 오니

요량하여 누룩도 장만하고

병아리 몇 마리 놓아 먹일람니더

단오(端午)가 며칠 안남았으니

치밭목 곰치나물도 더 챙기야지예”

새록새록 정겨운 산골의 아랫목

청자 연기 구수하게 쉬 깊는 봄밤

섬돌 위 낡은 통일화 옆 가지런한 코고무신

꿈결에 신어보는 머리맡 새 운동화

가랑잎 교정 가로질러 달음질치면

가난만, 뽀오얗게 달빛처럼 쌓인 툇마루

솥적 솥적 소쩍새 소리라도 덧쌓여라

니 배는 똥배고 내 손은 약손이다

어머니 애 태우는

간고등어 한 손만큼 아이는 횟배를 앓았다   

 

 

♧ 다리 우에서 - 이용악

 

바람이 거센 밤이면

몇 번이고 꺼지는 네모난 장명등을

궤짝 밟고 서서 몇 번이고 새로 밝힐 때

누나는

별 많은 밤이 되어 무섭다고 했다

 

국수집 찾아가는 다리 위에서

문득 그리워지는

누나도 나도 어려선 국수집 아이

 

단오도 설도 아닌 풀벌레 우는 가을철

단 하루

아버지의 제삿날만 일을 쉬고

어른처럼 곡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