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詩’ 7월호와 능소화
능소화 흐드러지게 핀 날에 ‘우리詩’ 7월호가 배달되었다. 속표지에 이육사의 ‘청포도’를 곁들인 맛나는 시지의 권두 칼럼은 정순영 시인의 ‘시詩 하는 일’이다. 담론으로 곁들인 임보의 ‘물권사상物權思想’, 두 글의 제목부터가 관심을 끈다. 신작시 20인 選은 유승우 홍해리 정성수 김동호 김소해 정복선 김계영 손현숙 도경희 조경숙 나기창 이혜숙 고미숙 한영채 한석호 민구식 김봉구 채영선 신미애 이상윤의 시를 실었다.
양선규의 인문학 스프는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이고, 한시한담은 조영임의 ‘우암 송시열과 화양동’이다. 신작 집중 조명은 임채우의 ‘육계肉鷄’외 5편과 ‘꼽추의 변辯’, 서량의 ‘12월에 부는 바람’외 4편과 ‘6개월에 걸친 시작 노트’를 곁들였다. 탐방은 홍예영의 ‘운수재韻壽齋를 찾아서’, 시인의 시 감상은 이제니 시집 ‘아마도 아프리카’를 박승류가, 이 달의 수필로 최상호의 ‘나무들의 수난시대’와 이재부의 ‘단상이제 短想二題’를 실었다. 시를 읽고 맘에 드는 시 몇 편 골라 능소화와 같이 올린다.
♧ 송화단(松花蛋)* - 홍해리
잘 삭힌 홍어처럼이나
오리알이 푹 삭고 나면
제 몸속에 송화를 피운다
꾀꼬리 울 때
노랗게 날리는 송화가루
그 사이를 날아
새는 소나무 속으로 숨고
알은 썩어서도
꽃을 피워 제 몸을 연다
드디어
백자 접시에 현현하니
천하 진미 따로 없다.
-----
* 송화단 : 피단(皮蛋)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삭힌 오리알
♧ 느림보들아 - 김동호
숙성熟成이 느린 홍어야
기침起寢이 느린 곰아
출생이 느린 만득晩得아
성장이 느린 대기大器야
응답이 느린 미륵彌勒아
고맙다, 너희들이 있어
이 세상 잘 돌아간다
벼룩은 빠르게
완행열차는 느리게 잘들 간다
♧ 무화과나무 아래 - 김소해
부끄러워 숨을 곳이 잎사귀 하나라면
이제 더는 흔들리거나 헤매지 말아라
벗은 몸 빚진 목숨을 기대보는 이 하루
♧ 좌망坐忘 - 정복선
가망 없는 곳에 그물을 던졌구나
너무 높이
너무 깊게
너무 오래
너무 멀리
저 무한천공에 떠가는 구름처럼!
♧ 저문다는 것은 - 한석호
말없이 젖는다는 뜻
행과 행 사이에서
혼곤하게
지평선을 끌고 온 물소리가
멀어져 가듯
♧ 세심 - 김봉구
화단 옆 수돗가
작은 물통이 부산하다
헐거운 바람에도
구름을 빠져나온 낮달이 들어가고
둥지로 돌아갈 새들
물 위에 떠 있는 석양의 부스러기 쪼아댄다
몰래 돌아간 새앙쥐
이 닦은 자욱 선명한
비누 한 조각
바닥으로 길게 누운 단풍나무의
그림자 문지른다
하루를 갈무리한, 그들
돌아간 자리
나는 손을 씻는다.
♧ 기도 - 채영선
새 한 마리 날아간다
이름 모르는 새
흙탕물 남겨 놓고
큰 새 한 마리 날아간다
참새며 딱따구리며
머리를 조아린다
쯧쯧쯧
물 먹고 하늘 보고
물 먹고 하늘 보고
하나님
큰 새에게
목욕통 하나 따로 주세요
♧ 못은 - 이상윤
다리 부러진 낡은 책장을
문 밖으로 옮기다 못에 찔렸다
깊게 패인 못 자국
못에 대해 골몰해 보기로 한다
못은 꽃이 떨어지고 남은,
수분이 다 증발한 꽃대일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못은 끈의 또 다른 이름이거나, 혹은
버려지는 것들과
함께 버려지는 것으로 정의해 본다
그렇다면
당신과 나도 못 때문이었을까
우리를 하나로 붙들어 놓았던 것이
못이 견뎌낸 시간이었고
떨어져 나간 서로의 배후에
저릿저릿한 얼굴로 서있어야 했던 것이
그 못의 잘못이었을까
밤보다 새벽이 더 가까운, 지금
아픈 쪽으로 결론을 내보기로 한다
못은 분리되어 버려진 것들의
도드라진 상처라고
창틀에 휘어진 못 하나
저건 무엇으로 정의할 수 있을까
그래, 상처의 무게라 해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