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죽도 여름하늘을 태우다
아침 9시 삼성우체국으로 가는 길
벌써 하늘에는 해가 높이 떠올라
이 협죽도를 태우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우리 학교 입구와 정문에서
여름이면 더운 날씨를 골라 피던 꽃
어머님은 늘
일본군인들 그곳에서 이 나무줄기를 잘라
도시락을 먹은 뒤 하나둘 쓰러지는 것을 봤다고
한사코 주의를 주던 나무 협죽도.
그도 그럴 것이
더운 지방에서는 이 액을 뽑아
화살촉에 바른다.
그리고 이 협죽도는 1,000여 종의
교목, 관목, 목본성덩굴, 풀로 이루어지기도 하고
꽃색도 분홍, 흰색, 자주, 노랑 등 구구각색이다.
이렇게 더운 시절을 끄떡 없이 피는 걸 보면
독종은 독종이겠어.
♧ 협죽도에게 동의하다 - 김종제
세상으로부터
당신 마음으로부터
한 발 비켜선 곳에
독(纛) 같은 꽃이 살고 있다
아니 여름의
뜨거운 독(獨)으로 키운 꽃이 있다
한 시절 나도
방황의 독으로 가득했으니
나, 어부사시사(漁夫四時辭)에 동의한다
나, 그토록 유배당하기 원했던
보길도에 동의한다
부용동 세연지에 동의한다
오우가(五友歌) 대신 핀
협죽도라는
유도화라는 꽃에 동의한다
입술에 닿으면
은둔 같은 잠을 유도한다고
유폐 같은 죽음을 유도한다고
한몸에
버드나무잎 복숭아꽃 따로 들어선다니
저 화(火)의 갈증(渴症)의 세월을
어떻게 견뎌왔을까
불타버린 마음에서
풀도 나무도 아닌 것이
제일 먼저 부흥으로 피어난다는
당신과 마주친다
바다 건너 온 것들 모두
당신에게 첫발을 딛는다고 했던가
보길도에서
나, 윤선도 협죽도 당신에게 동의한다
♧ 협죽도, 난 그댈 기억한다 - 박얼서
하숙집 마당 한켠에서
고독한 겨울을 나는 수도자 협죽도
난 그댈 기억한다
누구에게나 황금기는 있는 법
잘 나가던 여름 날
분홍빛 세월에 빠져있던 시절
그댈 처음 만난 이후
쌓기 시작한 공든 탑이
환호성 치는
순간이 있었다
계절의 신작로를 이어 달려
식객들 두리번두리번 바뀌는 동안
보드기 품 속 같은 수려함에서
아름다움을 경계시키는 신념까지
아무도 그댈 몰랐었구나
그래도 넌 그날을
소중히 간직해 두었느냐
그해 신년 초
신춘문예의 불꽃
푸르른 월계관 번쩍 든 기억들
꼬옥 끌어안은 채
벼랑 끝 혹한을 말없이 견뎌내는
난 그댈 똑똑히 기억한다.
♧ 그리운 사람 - 고혜경
칡 잎 사이로
보고픈
한 사람
웃음을 감으며
날 내려 다 본다
따라 나선 길목마다
덩굴손이 돌돌 감아
잔털로
그리움을 찢는다
협죽도 꽃잎
아랫입술 터트려
선홍빛
수의(壽衣)입고
당신에게
갈 수 있는
사랑이라면
소나기 퍼붓다
진실 없이 죽어 간
코스모스인들
가슴에 못 품을까
♧ 라벤더 - 노혜경
죽음이 갑자기 내 곁에 누워서, 오래 묵은 술처럼 향기롭게
내 뼈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오래 묵히면, 그대도 향기롭겠다고
나도?
오, 나도!
나는 갑자기 무덤이 된다
내 위로 아직 없는 나무들이 보인다
생겨나지 않은 줄기들이 먼 별을 향하여 가지를 벋고
그 가지 끝에서 연록색 이파리들이 하늘거리는 걸 나는 본다
향기들이 퍼져 간다
협죽도? 오, 아니, 라벤더? 그 무엇 같기도 한 같지 않기도 한
향기가 자라난다
라벤더.
♧ 박용래 - 나태주
술
술은 마음의 울타리
술 속에 작은 길이 있어
그 길을 따라 가 보면
조약돌이 드러난 개울
개울 건너 골담초 수풀
골담초 수풀 속에 푸슥푸슥
날으는 동박새
스치는 까까머리 아기 스님 먹물 옷깃
누가 마음의 울타리를 흔드는가
누가 마음의 설렁줄을 당기는가.
江景
안개비 뿌옇게 흐려진 창가에 붙어서서
종일 두고 손가락 끝으로 쓰는 이름
진한 잉크빛 번진 서양 제비꽃, 팬지
입술이 갈라진, 가슴이 너울대는.
오류동
방안에 들였어도 퍼렇게 얼어죽은 삼동의 협죽도
쇠죽가마 왕겨불로 달군 방바닥은 등을 지져도
외풍이 세어서 휘는 촛불꼬리
들리지도 않는 부뚜막의 겨울 귀뚜라미 소리
찔찔찔찔 들린다 해서 잠들지 못하는
초로의 시인
웃목에 얼어죽은 제주도 협죽도가
함께 불면증을 앓고 있었다
대전시 교외 오류동
삼동의 삼경, 귀를 세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