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지꽃은 여름인데도
제비나 팬지꽃 모두 봄에 핀다 했는데
아직도 뜨거운 하늘에 남아 피고 있다.
장마 전선은 휴전선을 오르내리며
물난리를 일으켜 사람들을 못 살게 구는데
이곳 제주는 마른장마와 열대야로
사람을 못 살게 굴고 있다.
밭에 심어놓은 콩과 참깨 등 곡식은
목이 타 그냥 다 말라가는 이 사태가
누구의 사주하에 일어나고 있는지?
아, 정말 힘든 여름이다.
♧ 팬지의 사연 - 槿岩 유응교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새엄마 밑에서
세상을 살아보지 않으면
그 어려움을 모르실거에요.
그러나
저는
새엄마가 데려온 언니들이
비록 사치와 낭비가 심해도
모든 걸 이해하고 사이좋게
지내며 잘 지내고 있답니다.
한 지붕 아래서
정을 주고받으며
서로가 개성이 강하고
빛깔이 다르더라도
그로인해 오히려
사랑 받는 존재로 변화해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서
깊은 사색에 잠기며
우리만의 작은 보금자리를 만들고
행복한 나날 속에
지나가는 사람들을 즐겁게 바라보면서
한없는 기쁨으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사랑과 행복을 위하여!
♧ 한 송이 얹어 두고 왔습니다 - 이향아
파스테르나크 씨
당신의 감자밭을 둘러 보고 왔습니다.
당신이 임종하던 좁은 참상에
올리브 색이 바랜 낡은 담요에
나도 붉은 장미 한 송이 얹어 두고 왔습니다
당신의 무덤에는
혁명의 붉은 별도 없고
참배자도 파수병도 없었습니다
조국을 떠나는 것은 죽음이라고 하더니
이 자리를 지켜 죽은
파스테르나크 씨
당신의 묘지 따뜻한 흙이
페레스트로이카라고 쓴 푯대를 들고
방금 심은 팬지 꽃 뿌리를 내리려고
창백한 얼굴로 앓고 있었습니다
♧ 年代記的 몽타주 12 - 이재창
금남로 걷다 보면 생각난다, 민주주의여
푸른 하늘 죄 없어도 떨려오는 가슴 아래
오늘은
너에게 안부를 묻는다
머나먼 그리움의.
생각나지 않느냐, 지울 수 없는 함성들이
잊혀지지 않는구나, 떠나갔던 친구들이
사람이
사람으로 태어난
그 인식의 죄업 끝에.
오월이 돌아오면 가슴이 떤다, 민주주의여
너는 지금 어느 땅 밑 숨죽여 누웠느냐
철쭉꽃
장미꽃 팬지꽃
모두 만발한 이 봄날에.
♧ 봄볕을 두드리다 - 고명자
춘삼월 달력처럼 담벼락에 붙어
팬지나 선인장 등을 파는 남자가 있다
손바닥만한 화분을 이리저리 옮겨 놓으며
볕이 잘 드는 쪽으로 생을 옮겨보는 남자가 있다
흙 한줌에 용케 뿌리를 내리고
소꿉놀이에 깊이 빠진 어설픈 중년
빳빳한 새 봄으로 거슬러 주기도하면서
봄볕 만지작거리다 그냥 가도 뭐라 말하지 않는다
꽃 따위나 사랑을 하다가
햇살을 등지고 앉아 깜박 졸던 사이였는지 모른다
유리창에는 매화를 뜯어 붙이고
모란 문양을 떠 가난을 땜질하면서
개다리소반에 김치찌개 한 냄비 소주 반 병
헐벗은 행복을 훌훌 떠먹다
난전의 꽃, 다행이다 그늘 한 뼘은 깔고 앉았다
등줄기 꼿꼿하던 꿈
몇 번의 내리막과 커브를 돌다 둥그러진 남자
더 이상 물러 날 곳이 없다는 듯
국방색 어깨를 담벼락에 척 걸쳐놓고서
♧ 수수꽃다리 - 김승기
북한산 깊은 골짜기
꼭꼭 숨은 정향나무
누가 너의 씨를 훔쳐갔느냐
벌 나비 부르려고 터뜨린
그놈의 향기 때문에
어느새 도둑맞았구나
도둑맞은 씨앗
라일락으로 튀기 되어 돌아와
미군부대 기지촌 방석술집의 마담 언니처럼
요염한 자태로 진하게 화장하고
흐드러진 웃음 헤프게 팔고 있구나
잃어버린 게 어디 너의 씨뿐이랴
패랭이꽃이 카네이션 되었고
닭의장풀은 양달개비 되었으며,
참다래도 키위 되어 되돌아오고
제비꽃은 팬지로 돌아왔으니,
도둑맞은 게 한둘이어야지
사람들아
소 잃고도 외양간 고칠 생각을 않으니
언제 또 무엇을 잃을지
마음 놓지 못하겠구나
이젠 버젓이 주인 행세까지 하며
무소불위로 온 누리를 활갯짓치는 라일락
그 위세 당당한 몸짓에
기죽은 수수꽃다리의 찡그린 얼굴
수줍은 웃음이 서글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