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작가 여름호의 시조
일요일인데
일기예보에도 없는 비가 내린다.
목타는 농민들에게는
참으로 단비가 아닐 수 없다.
모처럼 오름 해설사 1기모임에서
소풍 겸 나들이를 간다고 하면서
초대하길래
소풍은 설쳐도 좋으니
비가 더 오기를 은근히 기대하며
오름으로 가다가 길을 달리 하여
어느 길과 냇가가 만나는 다리 아래로 갔다.
비는 이미 그쳐버렸지만 그래도 단비라
그 비를 맞고 초롱초롱 빛나는
이 닭의장풀 꽃과 조우했다.
♧ 내 사랑 삼양(三陽)에 가면 - 오영호
원당봉 텃새들도 눈을 뜨는 범종소리에
불탑사 5층석탑 천년을 이고 서서
문을 연 마을 집집마다
화엄의 빛 보내는
그 옛날 설개, 감은개, 매촌
세 마을이 합(合)하여
선사(先史)의 집에 삼양의 깃발 다니
태곳적 점토띠토기 저리 환히 빛나고
호미같은 해안선 따라 파도가 달려와서
올레길 걷고 있는 나를 보고 하는 말
내 안의 나를 찾기 위해
놀멍쉬멍 걸으란다.
내 몸의 검은 땟국을
뽑아내는 검은모래찜질
아들 손자 손을 잡고 부르는 이어도노래
포구 밖 통통배 한 척
만선의 꿈 낚고 있네.
♧ 들레 생각 - 고정국
-시조로 쓰는 스토리텔링
약간씩 모자라서 우리 둘은 사이가 좋았다.
성은 ‘민’이었고 이름은 ‘들레’라는
그 노란 코흘리개가 나도 무척 좋았다.
일학년 옆자리에 자리 잡고 앉은 아이
이름 석 자 겨우 쓰고 히죽히죽 웃던 아이
그 여름 방학이 끝나자 학교 오지 않았다.
사삼 때 고아가 된 두 살배기 이 아이를
피난민 민 씨가 챙겨 ‘민들레’가 됐다는 아이
가엾어, 그해 여름에 뇌염 걸려 죽었다.
생각, 생각 끝에 민씨 집에 찾아갔다
민씨네 초가집엔 아무도 살지 않고
마당에 ‘들레’를 닮은 꽃송이를 보았다.
작은 키 통치마에 단발보다 짧은 머리
터진 고무신을 얼기설기 꿰매 신은
웃을 땐 눈이 없었던 꽃송이를 보았다.
세월은 흐르고 흘러 오십년을 넘게 흘러
쇠똥도 약이 된다는 초파일의 금악오름
혼자서 소를 먹이는 그 아이를 보았다.
작은 키 통치마에 단발보다 짧은 머리
터진 고무신을 얼기설기 꿰매 신은
웃을 땐 눈이 없었던 민들레를 보았다.
지상의 백년이면 천상의 하루란다
쫓기는 수사슴이 화살을 예감하듯
들레는 그곳에 와서 나를 기다렸단다.
봄 동산 모든 꽃이 첫사랑의 화신인 거
약간 모자라야 꽃의 마음을 안다는 거
첫사랑 나의 ‘들레’가 진짜 시인이었던 거
지상의 모든 사랑엔 해피엔딩이 없다는구나
아프게 세상에 와서 아프게 봄을 웃는
눈 없는‘들레’의 얼굴에 내 눈물이 맺힌 날.
♧ 꽁초 - 장영춘
한때 누군가의 불꽃으로
타오른 적 있었네
지문 닿은 손끝으로
허공에 길을 내던
수은주 빨갛게 오른 세상 속을 엿보네
예전엔 그대 마음
어르고 얼렀지만
갈 데까지 가서야
속절없이 손을 놓아
저렇듯 밟히고 밟힌 시 한 줄이 누웠다
♧ 자연학교 - 이애자
햇살 꼬~옥 움켜쥐고 나온 고사리 봐라
제 먹을 것은 제가 다 갖고 나온다더라
푸르게 자라더니만 손 펴고 사는 거 봐라
♧ 산딸나무 - 홍경희
시를 짓는 일이
삼천 배보다 어려운 날들
화려한
수식어를
봄철 내내 지우고
안개 속
산딸나무는
사족 없이 피어서,
손사래 건성건성
뜻 없는 인사말인 듯
바람개비
순한 순리
욕심 없는 사람인 듯
달빛에
버무린 슬픔
뿌리 없는 꽃인 듯
♧ 발톱 - 김영숙
벚꽃 피어 돌담이 오후 내내 환 한 날
밤과 낮 여든 해 받힌 발톱들을 깎는다
뭉툭해 이도 들지 않는 아버지 엄지발톱
오늘 내가 자른 것은 어쩌면 당신의 청춘
내향성 발톱처럼 안으로만 숨기셨을
이제는 다 삭아 내린 젊은 날의 꿈일지도
식구 하나 늘 때마다 각이 벌어 졌을까
누런 콥 키틴질이 푸석푸석 주저앉네
반달 문 연분홍 시절 원래 없는 것처럼
한창때는 마을 대표 마라송 선수였던
햇살 아래 백화, 발등이며 정강이를
엎드려 입맞춤 했네, 눈물 꼭 씹으며.
♧ 오리 날다 - 김진숙
나, 이제 병든 계절을 지우려 한다.
무심히 벚꽃 나리는 버스정류장 근처, 낮부터 취기
오른 편의점 간이탁자에 부르튼 꽃잎 한 장을 잔속에
얹히다 말고, 잠이 든 중년 남자의 움푹 파인 계절 속
으로 때 절은 오리털 파카 그의 기록을 훔쳐본다. 삐
죽이 실밥 사이로 갓 부화한 오리들과 노숙에 익숙한
꽃들이 깃털 한 장씩 내보이며, 서둘러 꽃을 지우려 한
다. 붙임성 없는 봄날,
난만히 세상 밖으로 날갯짓 저 오리 떼.
♧ 테왁 - 강봉수
이어도 꿈을 꾸는 꽃 하나 물에 피었다
바람이 부는 날에 소복이 피어나서
수평선 막힌 먼바다
구름타고 넘는다
할머니 팔십평생 탯줄 묻은 제주바당
오늘도 표류하는 힘겨운 숨비소리
해풍에 그을린 아낙
망사리가 무겁다
밀물로 나아가서 썰물로 돌아올 때
열기 식은 불턱에 다시 돋는 그리움
저승을 건너온 이승
노을빛도 붉으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