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바라기의 비명
♧ 2013년 9월 11일 수요일 맑음
날씨가 제법 선선해지고
푸른 하늘에 흰구름이 떠돈다.
이럴 때 시골길로 차를 달리다 보면
가을을 맞는 해바라기가 볼 수 있다.
나는 해바라기를 볼 때마다
‘나의 무덤 앞에는 그 차가운 비ㅅ돌을 세우지 말라.’던
‘해바라기의 비명(碑銘)’의 시인 함형수의 시가 떠오른다.
♧ 해바라기의 비명(碑銘) - 함형수
-청년 화가 L을 위하여
나의 무덤 앞에는 그 차가운 비ㅅ돌을 세우지 말라.
나의 무덤 주위에는 그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 달라.
그리고 해바라기의 긴 줄거리 사이로
끝없는 보리밭을 보여 달라.
노오란 해바라기는 늘 태양같이 태양같이 하던
화려한 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라.
푸른 보리밭 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
아직도 날아오르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
♧ 해바라기의 변명 - 김형출
시방 나는 미친 태양이다
황금빛이 유난히 예리하게 보이는 것은
태양을 사모하기 때문이다
시원한 땡볕이 그립다
팔월의 아침은 강인하다
사막에 뿌리 내린 선인장처럼
보도블록 틈새에서 탈골된 생명처럼
태양은 황금빛 꽃을 피운다
변절된 배반은 해바라기라는 이름일 뿐
강인함은 못되리라
녹색의 정원에 태양이 눈부시다
황금빛으로 세공한 고호의 해바라기가
벽에 붙어 우리 가족 이야기를 엿듣고 있다
아들 비장에도 해바라기의 꽃씨가 피어나고
이글거리는 태양빛으로 또 다시 황금빛을 심어다오
파란 하늘 사이로 노을이 보이거든
우리는 땡볕 한 줌 호주머니에 넣고서
해바라기가 피어있는 잉카제국으로 달려가리라
너의 확장된 기다림을 위하여
♧ 해바라기 - (宵火)고은영
나는 너로부터 탈골되었다
지상의 모든 기억들이 하나 둘 사라져 갔다
412개의 뼈 들이 서로 엉켜 춤을 추웠다
우리 유역에 불던 바람은
저 먼 강 하구로부터 수몰된 본능을 깨우며
모락모락 안개로 피어 올랐다
음험한 배고픔이 거리를 배회했다
염전 같은 거리
사랑은 비로소 어둠으로 사라져 갔다
그리고 몇 개의 주검이
또 다시 거리를 떠돌았다
마른 잎들은 서로에게 따뜻한 위로를 물었다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히는 일은
다시 만남을 예고하는 여백이라고
나의 방은 온통 초록의 숲이다
검푸른 초록에서 나는
깊고 깊은 우울에 젖어 모더니즘을 읽는다
균형을 잃은 나의 시어들은 환기가 필요하다
사랑 지상주의에 입각한 양심과 자유를 향한 갈망은
이제야말로 선명하게 부각돼 와야 한다
나는 믿고 싶지 않다
불황의 그늘에 가리어진 남루한 눈물들
그 길고 지리한 염원과 의혹
이미 주검으로 돌아앉은 사랑을 부르는 허무
지독한 목마름에 뭉클하게 걸린 그것은
진실하고 아름다운 사랑이었다고
이제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사랑은 없다
♧ 해바라기 광장 - 김종제
소낙비에 쉬이 꺼지는
촛불 대신에
광풍에 가볍게 찢어져버리는
깃발 대신에
우리들의 광장에
해바라기를 심으면 어떨까
시커먼 돌을 다 들어내고
발에 짓밟힌 잔디도 없애버리고
어머니 같은 흙을 깔아놓고
아버지 닮은 저 태양을
광장에 가득 피어나게 하면 어떨까
한가운데도 구석진 곳에도
쑥쑥 잘 자라서
우리들만큼 키가 크면
둥근 얼굴 서로 맞대고
그옆에 나란히 서 있고 싶어지는
해바라기숲을 만들면 어떨까
그 노오란 빛깔에 취해서
온갖 나비도 날아들고
어느새 씨앗이 익었다고
처음 눈 마주친 사람에게도
울렁울렁거리는 가슴으로
사랑을 고백하도록 하면 어떨까
어느 하루 쉬는 날이면
가족들 다 데리고 광장에 나와
아직 꽃 덜 핀 곳에 앉아서
하하하하, 입 크게 벌리며 웃는
해바라기가 되면 어떨까
♧ 해바라기의 고독 - 정군수
너는
태양을 향하여 원반을 던지는
여전사(女戰士)
너의 눈은
한번도 태양을 떠난 적이 없다
태양의 흑점
그 한점을 쏘기 위해
태양이 내린 열기로
노란 담금질을 하고
더 쇳소리가 나는 원반을 던진다
태양을 무너뜨리고
태양이 되기 위해
눈부신 태양을 향해
눈을 부릅뜨고 태양을 쏜다
세인들의 혀는
너를 해바라기라고 하지만
너의 고독은 태양보다 크다
쏘고 또 쏘고
너의 원반에 태양의 파편들이
촘촘히 들어와 박히면
끝내 무거워진 고독을 안고
차디찬 들길에서 태양을 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