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에 흐르는 가을의 詩’로의 초대
제24호 태풍 다나스도 탈 없이 지나가고
이제 성큼 가을로 접어들었습니다.
오늘 우리 사단법인 제주작가회의에서는
시민 여러분을 모시고 동문시장 북쪽 입구 산지천광장에서
시화전과 문학의 밤을 갖고자 하오니,
참석하셔서 깊어가는 가을밤의 정취를
마음껏 즐기시기 바랍니다.
* 때 : 2013년 10월 11일(금요일) 오후 6시반
* 곳 : 제주시 동문로 산지천 광장
♧ 가문동 편지 - 故정군칠
낮게 엎드린 집들을 지나 품을 옹송그린 포구에
닻을 내린 배들이 젖은 몸을 말린다
누런 바다가 물결져 올 때마다
헐거워진 몸은 부딪쳐 휘청거리지만
오래된 편지봉투처럼 뜯겨진 배들은
어디론가 귀를 열어둔다
저렇게 우리는,
너무 멀지 않은 간격이 필요한 것인지
모른다 우리가 살을 맞대고 사는 동안
배의 밑창으로 스며든 붉은 녹처럼
더께진 아픔들이 왜 없었겠나
빛이 다 빠져나간 바다 위에서
생이 더욱 빛나는 집어등처럼
마르며 다시 젖는 슬픔 또한 왜 없었겠나
우리는 어디가 아프기 때문일까
꽃이 되었다가 혹은 짐승의 비명으로 와서는
가슴 언저리를 쓰다듬는 간절함만으로
우리는 또 철벅철벅 물소리를 낼 수 있을까
사람으로 다닌 길 위의 흔적들이 흠집이 되는 날
저 밀려나간 방파제가 바다와 내통하듯
나는 등대 아래 한 척의 배가 된다
이제사 너에게 귀를 연다
♧ 그리움에는 바퀴가 달려있다 - 김광렬
그리움에는 바퀴가 달려있다
덜컹덜컹, 때로는 미끄러지듯
내가 닿고 싶은 곳으로 데려다 준다
그리움이 짙으면 짙을 수록
바퀴가 굴러가는 속도는 빠르다
어느새 내가 가고 싶은 곳에 닿아 있다
너는 모르지 너의 곁에 내가 있는 것을
지금 바로 출발한 내가
너의 손에 편지처럼 들리어져 있는 것을
이별이 바퀴를 굴리며 떠나가듯이
그리움도 바퀴를 굴리며 떠나간다
이별이 우리를 갈라놓았지만
헤어졌다고 그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리움으로 슬픔을 덮으며 살기도 한다
그리움에는 바퀴가 달려 있어서
늘 너에게로 떠날 수 있어서
이별은 있어도 좋다
♧ 외딴집 - 홍성운
누가 살아서
지붕에 고추를 말리시나
큰 길이 뚫리기 전, 아는 이도 없었을 집
흉년 든
어느 해인가
그냥 밭에 눌러앉았을
요즘 들어 울담에는 애호박도 보인다
털다 만 깻단들이
마당에 수북한 날
“계세요?”
“누구 계세요?”
인사라도 하고 싶다
정작 반세기 동안 이웃 없이 지내서
말문이 닫혔다면 이 가을엔 여시라!
불임의 먹감나무가
해거리 끝에
땡감 달듯이
♧ 레퀴엠 - 이종형
바다가 그의 묘지가 되었으므로
파도는 묘비명처럼 시시때때 울컥울컥 읽힐 것이다
높낮이 없는 生이 휘휘 돌아 가는
등 굽은 길들을 만날 때마다 더러더러 슬프고, 슬플 것이다
허리 꼿꼿했던 그가
수직으로, 때로 수평으로 흔들리며
등부표로 떠오르는 바다
나보다 먼저 와 우는 바람을 등에 업고
천촉 집어등 눈부신 바다로부터 오는 저녁이여
거꾸로 읽고 싶은 생의 몇 날
썰물 때 드러난 검은 바위들이
앙상한 등뼈처럼 말라갈 무렵
그가 세상에 다녀간 흔적처럼
바람의 지문*도 찍혔다 지워지길 반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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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지문 : 정군칠의 詩 ‘바람의 지문’을 빌리다.
♧ 올레길 연가 6 - 오영호
걸어온 길 돌아보면
부끄러운 일 너무 많아
어쩌면 샛길 찾아 숨고 싶은 양심 앞에
한 발짝 다가설 때마다
황사바람만 불어오고.
안경색 따라 하늘빛이 달라지듯
모든 것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마음을 다스리는 것
뾰족 돌 채인 발톱에
새로 돋는 발톱 하나.
♧ 물매화 - 문영종
물~매화 하고 읊조리니 여린 개울물처럼 흘러간다. 흘러가는 물에 꽃들이 떠가는 게 보인다. 가는 바람에도 흔들거리며 눈물을 쏟아낼 것 같고, 이별하는 이를 위해 눈물을 오래 삭히며 간직한 연인 같은 꽃을 용눈의 오름에서 만났다.
눈물을 보이지 않고 돌아설 수 있을 것 같은 꽃
보고 싶어도 눈물을 안으로 삼키며 향기를 내는 꽃이 여기 있다
♧ 붉은, 시월 - 김희정
길 잃은 단풍들
시월의 숲을 보았는가 백 년 전 외쳤던 그 목소리가 메아리로 산다 숲길은 삭정이만 남아 더 이상 푸른 잎을 잉태하지 못했다 시베리아 기단을 등지고 남하하는 가지 사이로 나부끼는 붉은 깃발들 소멸과 싸우는 시간을 알리려 봉홧불처럼 산봉우리를 태운다
나무에 매달린 늙은 잎들, 꿈의 애착에 파르르 떤다 투쟁을 연상시키는 바람의 출정기는 잎들을 매장한다 탈색된 수많은 혁명가들 하얗게 질려 각혈을 하다 나무 품으로 돌아간다 혁명을 좇다 산산이 부서진 잎들 저 잎들이 봄의 새싹으로 태어나기까지 나무는 추운 겨울을 보내야 한다
혁명은 늘 한 발짝 늦게 숲에 온다, 그래서 나무가 춥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