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루공원의 느티나무
어제는 제주노루생태공원을 통하여
숫모루 숲길까지 이어지는 편백숲길을 걸었다.
그런데 생태공원 길에 가로수로 느티나무를 심어 놓아
노랗게 물들어간다.
중산간 마을 훨씬 위에 자리한 공원의 오후
노루 두 마리만 아버지와 같이온 어린 아들이 내미는
사철나무 가지를 받아먹고 있는 노루우리 밖
나이 들지 않은 느티나무들이 먼저 가을을 타고 있다.
옆의 거친오름과 진물굼부리의 나무들은
아직도 초록으로 버티고 섰는데
유독 이 녀석들만이 낭만을 즐기고 있었다.
♧ 느티나무 - 강정식
누런 잎새들 사이로
맥없이 떨어지는 햇살
아이들 재잘거림 속에 흩어지고
맨 가슴으로 황량하게
비어 간다
나도 한 그루 느티나무
시간을 생각하며, 내일을
사랑을 추억하며, 어제를
삭이고 말아야 하는 이별도 없이
한 번도 마주치지 않은 희망도
늘 오한 같은 신열을 품고
텅 빈 마당처럼, 내일을
혼자 서 있는 나무들처럼, 어제를
무엇으로 버틸 것인가
내게 말해 보란다
바람은 세차게 나뭇잎 떨구고
바람은 옷깃으로 파고들고
아직은 가을
느티나무 단풍이 지고 있다
♧ 느티나무의 자세 - 고재종
식풍에 씻고 씻기는
몇몇 집의 등불이다
박새가 타전하는 건
누군가의 호곡 소리,
느티나무 가지 끝들은
별들을 형형 쏜다
삭풍이 일구어대는
수십만 평의 적막이여
여울 소리에 되묻는 건
잿빛 시간의 길
느티나무 가지들은
또 무얼 씽씽 후리는가
정글도록 가마솥에
메주콩을 삶아대며
삭풍과 맞겨루는
느티나무를 엿듣자니
산 능선 활활 그리며
청둥오리도 날아온다
♧ 느티나무 - 나호열
다스리지 못한 마음을 생각한다
동구밖을 생각한다
가 보지 못한 길과
마을을 생각한다
그곳에 마을이,
사람이
모르는 마음이 있었다
천 년이 지나도록
자신의 쓰임새를 모르는
느티나무의 그늘이
한겹씩의 주름을 일으키는
파도가 되어 걸어온다
저만큼 느티나무는
베어질 그날을 기다리며
기둥이 될지
돛대가 될지
숯이 될지
의자가 될지……
어느덧 느티나무는
천연기념물이 되었다
♧ 느티나무 - 시리
그가 외롭다는 것을
늘 아담한 마을의 배경이 될 때는
정말 몰랐지만
석양노을이 그의 배경이 되었을 때
정작 알았다
남의 그늘이 되어주기 위해서는
얼마나 외로워야 하는 건가
바람 부는 날은
반짝이는 수많은 손을 흔들어
애써 감추고 있지만
저녁 무렵엔
그 큰 몸집도 진저리 쳐
작은 새 한 마리도
품지 못하고
마을 밖을 서성이며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인가 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고독한 기다림인가 보다
쓸쓸히 마을 어귀에서
축 늘어진 그의 어깨 위로
노을이 얹혀지는 것을 보면
마을 입구를 들어설 때마다
마을을 가린 배경으로
그를 스쳐지나온 뒤
허전히 돌아섰을 그의 마음이
내 마음에 자꾸만 밟힌다
한번도 팔 뻗어 안아주지 못했던
안 된 내 마음이
노을처럼 붉게 전신을 훑고 지나간 사이
나를 향해 떨구던
길어진 자신의 그림자를 지우며
어둠 속으로 얼굴을 숨기는 것을 보면
한 바탕 소리 없이 흐느끼고 있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