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카 일기

노루공원의 느티나무

김창집 2013. 10. 21. 09:29

 

 

어제는 제주노루생태공원을 통하여

숫모루 숲길까지 이어지는 편백숲길을 걸었다.

그런데 생태공원 길에 가로수로 느티나무를 심어 놓아

노랗게 물들어간다.

 

중산간 마을 훨씬 위에 자리한 공원의 오후

노루 두 마리만 아버지와 같이온 어린 아들이 내미는

사철나무 가지를 받아먹고 있는 노루우리 밖

나이 들지 않은 느티나무들이 먼저 가을을 타고 있다.

 

옆의 거친오름과 진물굼부리의 나무들은

아직도 초록으로 버티고 섰는데

유독 이 녀석들만이 낭만을 즐기고 있었다. 

 

 

♧ 느티나무 - 강정식

 

누런 잎새들 사이로

맥없이 떨어지는 햇살

아이들 재잘거림 속에 흩어지고

맨 가슴으로 황량하게

비어 간다

나도 한 그루 느티나무

시간을 생각하며, 내일을

사랑을 추억하며, 어제를

삭이고 말아야 하는 이별도 없이

한 번도 마주치지 않은 희망도

늘 오한 같은 신열을 품고

텅 빈 마당처럼, 내일을

혼자 서 있는 나무들처럼, 어제를

무엇으로 버틸 것인가

내게 말해 보란다

바람은 세차게 나뭇잎 떨구고

바람은 옷깃으로 파고들고

아직은 가을

느티나무 단풍이 지고 있다  

 

 

♧ 느티나무의 자세 - 고재종

 

식풍에 씻고 씻기는

몇몇 집의 등불이다

박새가 타전하는 건

누군가의 호곡 소리,

느티나무 가지 끝들은

별들을 형형 쏜다

삭풍이 일구어대는

수십만 평의 적막이여

여울 소리에 되묻는 건

잿빛 시간의 길

느티나무 가지들은

또 무얼 씽씽 후리는가

정글도록 가마솥에

메주콩을 삶아대며

삭풍과 맞겨루는

느티나무를 엿듣자니

산 능선 활활 그리며

청둥오리도 날아온다

 

 

♧ 느티나무 - 나호열

 

다스리지 못한 마음을 생각한다

동구밖을 생각한다

가 보지 못한 길과

마을을 생각한다

 

그곳에 마을이,

사람이

모르는 마음이 있었다

 

천 년이 지나도록

자신의 쓰임새를 모르는

느티나무의 그늘이

한겹씩의 주름을 일으키는

파도가 되어 걸어온다

 

저만큼 느티나무는

베어질 그날을 기다리며

기둥이 될지

돛대가 될지

숯이 될지

의자가 될지……

 

어느덧 느티나무는

천연기념물이 되었다  

 

 

 

♧ 느티나무 - 시리

 

그가 외롭다는 것을

늘 아담한 마을의 배경이 될 때는

정말 몰랐지만

석양노을이 그의 배경이 되었을 때

정작 알았다

 

남의 그늘이 되어주기 위해서는

얼마나 외로워야 하는 건가

바람 부는 날은

반짝이는 수많은 손을 흔들어

애써 감추고 있지만

저녁 무렵엔

그 큰 몸집도 진저리 쳐

작은 새 한 마리도

품지 못하고

마을 밖을 서성이며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인가 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고독한 기다림인가 보다

 

쓸쓸히 마을 어귀에서

축 늘어진 그의 어깨 위로

노을이 얹혀지는 것을 보면

마을 입구를 들어설 때마다

마을을 가린 배경으로

그를 스쳐지나온 뒤

허전히 돌아섰을 그의 마음이

내 마음에 자꾸만 밟힌다

 

한번도 팔 뻗어 안아주지 못했던

안 된 내 마음이

노을처럼 붉게 전신을 훑고 지나간 사이

나를 향해 떨구던

길어진 자신의 그림자를 지우며

어둠 속으로 얼굴을 숨기는 것을 보면

한 바탕 소리 없이 흐느끼고 있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