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올 문학의 시와 층꽃나무
추자도에 가서 층꽃나무를 찍었다.
시간을 아껴 동남쪽 끝자락에서
돈대산에 오르기로 하고
버스에서 내려 산으로 접어들었을 때
일련의 섬오리나무 군락이 나오고
그게 끝나는 지점, 길섶에서 이들과 마주쳤다.
이 녀석들은 보기엔 풀같아 보이지만
이름처럼 어엿한 나무이다.
‘다시올文學’ 가을호를 열어
시를 몇 편 찾아 같이 올린다.
♧ 가을이 차다 - 안갑선
쓸쓸하다
들판이 텅 비었을 때 가을이 왔음을 알고
남김없이 비워야 가을이다
모든 사물도 울긋불긋 가을이다
이 기간 동안 사람들은 마법에 걸린다
당신 바라보는 동안에도 얼굴은 온통 가을이다
사계에서 유일하게 허물 벗는 계절
낙엽 밟는 소리
밤 알 떨어지는 소리
풀 벌레 소리
만달이 떠도 스산하다
낙엽이 뒹구는 바람의 배경 앞에서
가슴 밑바닥까지 긁어 회상하는 계절
사색을 폭식해도 허기지는 가을
♧ 농악 - 나석중
농악을 앞세워 이 집 저 집 걸립하던 때가 있었다
그때야 풀뿌리 나무껍질로 달랑달랑 목숨 줄
이어가던 숨 가쁜 보릿고개 시절이었어도
무엇이든 흥겹게 절로 내어줄 수밖에 없었던
노랫말이 없어도 신명 나는
인종을 뛰어넘어 소통하는
농악은 요란하지만 시끄럽지 않다
박자와 리듬과 질서가 섞여 오히려
지독한 소음조차 몰아치는 이 음악을 듣다 보면
문명을 벗어던지며 잠깐 들썩들썩 원시인이 된다
무엇보다 오늘같이 바람 부는 날
먼 데서, 아득히
끊겼다 이어지던 鄕愁의 징소리를 잊을 수가 없다
♧ 바람이 일면, 그냥 피 붉겠다 - 염창권
바람이 일어 허공에 길 놓으면 산도 몸을 뒤채이며 따라나선다 성긴 가지들이 일제히 이파리를 뒤집으며 바람의 길 따라 가벼이 휘인다 그 뒤척임으로 파도가 일렁이면서 한 때의 소요와 그 다음에 따라오는 소요를 파문 삼는다 이때 바람이 헛발 짚지 않도록 초록은 자리를 깔아놓는다 설령, 실수가 있대도 서두르다 젖국을 엎질러버린 네 몸처럼 울연히 생생할 뿐!
바람이 허공을 쥐었다 놓았다 하는 사이 산도 함께 몸을 들썩이는데 그건 바람의 지문을 몸에 찍어두려는 까닭이다 저것들의 모양을 보면, 애면글면 싸워 이기는 격한 사랑보다는 몸 쥐었다 놓았다 풀어주면서 먹먹하게 바라보는 온건한 파트너라면 더 좋겠다.
사랑이라고 꼭 아파야 하겠느냐? 바람이 일면, 그냥 피 붉겠다.
♧ 식탁 위를 노래가 덮네 - 김세영
나는 포식자이다
때로는 사납고 때로는 수줍은
사냥기술이 서투른 삼류이다
그러나 내 마지막 자존,
촌철살인의 비장의 송곳니는 있다
식탁의 주 메뉴는 주인이 남기고 간, 신선도 없는 유류품이다
상큼한 아카시아 잎도, 달콤한 블루베리도
그 향기에 코만 킁킁대지, 그 순정함을 먹을 줄 모른다
자칼처럼 생과 사, 그 황홀한 질주를 맛본 적도 없다
정강이뼈도 으스러뜨릴 수 있는 분쇄기 턱을
포크레인처럼 힘들게 치켜들고
짧은 다리로는 새끼 가젤도 쫓아기지 못한다
젊은 사자의 새로운 기법의 충격적 해체작업에
놀라움과 질시로 어지러운 머리를 가누기 어렵다
행주 같은 혓바닥 덕분에 나의 식탁은 식후가 더 깨끗하다
무섭도록 아름다운 노을의 식탁 위를
사냥꾼들의 노래가 덮으며
힘겨운 초원의 하루를 다독인다
자칼이 덤벼들거들랑 하이에나를 보여주고
하이에나가 덤벼들거들랑 사자를 보여주고
사자가 덤벼들거들랑 사냥꾼을 보여주고*
누군가 외치고 있어요, 쿰바야
누군가 울고 있어요, 쿰바야
누군가 잠들고 있어요, 쿰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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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민요
♧ 가장 느린 추격 - 김민철
해바라기처럼 햇살을 베고 누워있는 사자
아무도 접근하지 않았다, 그러나 구더기떼들만이
사자의 몸에 하나씩 올라타기 시작한다
맹수의 본능을 하나하나 부패腐敗시킨다
사바나 초원에서 구더기로 사는 나의 사냥법은 기다림이지 흙속에서 사자 발자국의 진동을 쫓아가지 절뚝거리거나 몸의 상처가 덧나는 시간을 포착해 그때부터 나는 사자가 나무 그늘에서 멈출 걸 예감하지 사자의 몇 발자국이 나에겐 반나절동안 몸을 굽히고 펴야 하는 거리인데 지금이 세상에서 가장 느린 추격전이라고 생각해도 좋아 사자가 흘린 침 자국을 따라가며 군침을 흘려본 적 있나? 난 군침의 힘으로 사자의 길게 늘어진 고통을 쫓는 거야
나무 그늘에 홀로 쓰러져 있는 사자, 아직 털이 살아있는 꼬리, 꼬리만 흔들어도 네 발 달린 것들은 오줌을 지려 그러나 난 알지 햇살과 그늘이 뒤섞이면 핏자국은 잘 썩는다는 걸! 난 천천히 상처의 틈새로 들어가고 있어 붉은 살부터 베어 물지 정신 없이 파먹다 항문에서 미끄러지는 구더기도 있지 감지 못한 눈동자까지 맛있게 먹고 나면, 내 몸은 탱탱하고 민감해지지 사자의 광대뼈 위에 앉아 수컷 얼룩말이 배다른 새끼를 뒷발로 짓밟는 소리마저 갉아댔지 지금 나는 다시 길고긴 부패의 시간을 추격할 생각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