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카 일기

감귤이 이렇게 익어

김창집 2013. 11. 9. 00:34

 

오른쪽 눈 백내장 수술이 잘 되었는지

안경을 안 써도 컴에 오래 앉아있다.

 

오늘은 내가 있던 학교에서

도서반 아이들에게 한 마디 해달라는 요청으로

월평에 가보니, 그새 과수원마다 이렇게

감귤이 잘 익었다.

 

적당한 작은 크기의 감귤이

상품이라더니, 그렇게 가득 달려 잘 익었다.

올해는 적당한 가격으로 잘 팔려

농부들의 주름살이 펴졌으면 좋겠다.   

 

 

♧ 감귤 - 주근옥

 

벗기며 쪼개며

 

한 쪽씩 입에 넣고

 

진저리 치네 

 

 

♧ 귤의 체온 - 이생진

 

귤은 겉보다 속이 차다

노크도 없이 문을 연 때문인가

귤은 손보다 가슴이 차다

 

손 탈 염려 같은 것

꿈에도 생각지 않고

찢고 들어온 흉적에 겁먹어

오들오들 떠는 것인가

 

귤은 겉보다 속이 슬프다  

 

 

♧ 늘 그런 세상 - 이선명

 

세상은 늘 그렇다

계절 없이 핀 사랑은

식어버린 커피처럼 쓰기만 하고

벗겨진 감귤처럼 서글프게

오늘도 애타고 그리운 나를

슬프게 그리움으로만 부른다

 

세상은 늘 그렇다

나의 마음처럼 벌거벗은 추억은

불현듯 옛 친구의 소식과 함께

열병 걸린 가을이 오듯

혼자 남은 기다림을

절망으로 화답하게 한다

그렇게 단념하게 한다  

 

 

♧ 한낮의 즐거운 상상 - 박종영

 

낮의 길이에서 한적한 시간은 꼭,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무렵이다

혼자 담백한 시간을 만지작거리자니

손안에 잡히는 것 없어 허전하다

 

마당에 나가 본다

늦은 장미가 담장에 눌러앉아

그럴듯하게 속내를 감추고

햇빛을 불러들이고 있다

 

오래된 봄에 나무시장에서 사다 심은

제주산 감귤나무가 어느새 커서

주렁주렁 노란 빛깔로 여물어가고 있다

 

대롱대롱 매달린 저 노란 가슴 안에

반달 같은 새끼를 몇 알이나 키우고 있길래

저리 가만가만 흔들릴까?

 

언젠가는 질긴 꼭지 돌려 따서

두툼하고 야들야들한 껍질 벗기고

알갱이 쏙 뽑아 한입에 넣으면,

새콤달콤 반달 같은 우주가 내 품으로 안길까?

  

 

♧ 귤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 김선우

 

골목길 돌아 나오다 누가 나를 불러

잠시 눈길 준 폐타이어 쌓인 창고 앞

조붓한 담장 아래 아기어금니처럼 돋아 있는

귤 싹 하나 만난다 지난 울 어느 늦은 밤

소주를 사러 점방 가는 길에 아무 생각 없이 뱉어낸

귤 씨 하나가, 아니겠지 설마 그 귤 씨 하나가

큰맘 먹고 사놓은 백 개 들이 귤 한 상자

한겨울 밤 야금야금 까먹던 그 귤들이

더러는 맑은 오줌으로 몸 밖을 흘러나가고

사는 일이 서리 앉은 빨랫줄 같아,

푸념하면서도 하루를 견디게 한 어떤 열량이 되고

잔주름 생기기 시작한 눈가

지친 세포의 자살을 지연시키는 비타민이 되고

어두운 상자 속에 얼마 남지 않은 귤 몇알이

그래도 천연스럽게 댕글댕글 빛나던 힘!

귤껍질에 빼곡히 열린 구멍이란 게 실은

저의 중심을 향해 세상의 향기를 흐르게 한 통로는 아니었을까

보이지 않는 중심을 향해 몸을 맞대고

껍질을 벗겨내도 흩어지지 않던 귤 조각

시고 달고 아린 저마다 다른 맛들이

열어둔 통로를 지나 중심으로 모이듯

귤 한 상자 놓여 있던 겨울의 귀퉁이가 문득 밝아지고

알전구같이 흐릿한 창밖의 그늘이

외로운 귤 알들로 빚어지곤 했던 것이다

  

 

♧ 귤 - 반기룡

 

한 겹 한 겹 벗길 때마다

새콤달콤하게 흥분시키는 이유가 뭘까

  

 

♧ 귤 - 나태주

 

시장바닥에 흐드러지게 나와 팔리는

귤을 보면 슬퍼진다

옛날에 그 귀하던 것이 저러이

흔전만전 나와 푸대접을 받고 있구나

저것들 키운 농부의 노고는 오죽했으면

저것들 팔기 위해 떨고 있는

아주머니의 추위는 또 얼마나 모질었으랴

더구나 저것들 키운

제주도의 햇볕은 얼마나 또

빛나고 눈부셨으랴.  

 

 

♧ 귤 향기 같은 사람 - 조찬용

 

이가 시리도록 바람도 칼날을 물었다

겨울이 고드름으로 익은 날

귤 향기로 사람들을 보내고

귤 향기로 떠나보낸 사람들을 맞이하는

정거장 같은 사람이 있다

가끔은 그가 보고 싶어 전철 역사에 간다

그보다 뜨겁게 행복을 운전하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

어둡고 음울한 그림자가

허리띠를 조이는 날이면

매운바람에 서 있는 정거장엘 간다

뜨거운 것이란 누구에게나 흐르는 핏줄의 함성이언만

태어나 더듬이가 망가지고 어눌한 걸음 그 바람 속으로

걸음을 옮기고 둥지를 트는

홀로 있어도 시들지 않는 뜨거운 인생

나도 그처럼 뜨거워지고 싶어

그가 사는 들판의 역사로 간다

웃음이 줄지 않는 그의 인사가 뜨겁다

차가운 세상에 귤처럼 속이 얼지 않고 향기가 나는

그는 분명 이 겨울의 주인이다

제 인생 하나 뜨겁게 붙잡지 못하는 내 겨울을 생각하면

그는 내가 쉴 정거장이고 향기다

내 속도 귤처럼 벗기면 향기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