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카 일기

문무병 시집 ‘11월엔 그냥 젖고 싶어’

김창집 2013. 11. 18. 10:32

 

추자도에 가려다 기상악화로 못 가

대신 서귀포 법정악 자연휴양림에서

만추를 즐기고, 모슬포에서 방어회까지 먹고 오다

꼭 들러야 하는 잔칫집을 거쳐

좀 늦게 무병이와 병심이가 스캔들을 벌이는

각 북카페에 이르러 보니,

잔치가 벌써 무르익었다.

 

문무병 시집 ‘11월엔 그냥 젖고 싶어’와

신화 이야기 1 ‘설문대 할망 손가락’,

김병심 시집 ‘신, 탐라순력도’외

산문집 ‘돌아와요, 당신이니까’를 넣은

이쁜 가방을 들고 보니까

아뿔사, 오늘 여러 행사를 치르노라

지갑이 비어 있다.

 

그래 시집을 외상에 사들고, 그들이 향하는

영자포차로 갔으나

더 이상 술을 마셔서는 안 될 것 같아

살그머니 문을 나섰다.

 

그 덕으로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

책 네 권을 훑고 나서

어제 법정악에서 찍은 만추(晩秋) 풍광과

문무병 시집 ‘11월엔 그냥 젖고 싶어’의

시 4편을 같이 옮긴다.

 

 

 

♧ 11월엔 그냥 젖고 싶어

 

늦은 가을

꿈도 바람맞은 날,

아침에 찬비 내렸고, 그녀에게서

저녁에 만나자는 기별이 왔다.

정말 빠르게 하루가 가는 운 좋은 날이었다.

바람타는 그녀와 마나면

바람아 어쩌지 하며,

곶자왈 오름 밭 억새 숲길 걸으며

11월은 그냥 조용히 젖고 싶다.

 

산 억새는

종교처럼 그윽하게 바람에 흔들리고

올 가을은 바람아,

내 코드 깃에 묻은, 감성의 시편들,

당신과 함께 한 세월의 낙서,

지워지지 않는 낭만의 바이러스

11월은 비에 젖어 그냥 가게 내버려두렴.

 

바람을 만나면 바람에 불리고

빌르 만나면 비에 젖으며

떨리는 마음 그냥 내버려두게.

그대를 닮은 ‘낭그늘’의 연인이여.

오늘은 연서를 받고 가슴 떨리는

바람에게 전하는 말, 청춘의 날들을 헤며

당신께 다시 쓰는 연서처럼 비는 내리고,

올해도 꿈 근처를 서성거리며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전할 수 없는 수천 겁 어둠 쌓여 있으니

아, 바람이여

11월 밤 빗속을 당신과 함께 젖고 싶구나. 

 

<!--[endif]--

 

♧ 올 가을엔 꿈을 꿔도 될까요

 

또 한 해 바람으로 살았으니,

흔들리는 마음 독하게 다스리며 살겠다고,

9월의 둘째 일요일 태풍의 길목에서 나는

당신을 꿈꾸지 말자는 메모를 남기고,

나 멀리 떠나려 했지만, 갈 곳이 없었습니다.

꿈을 버리니, 삭막했어요. 시는 더욱 멀어집디다. 그래서

오늘은 태풍의 끝을 붙잡고 가을여행을 준비합니다.

쓸쓸함이 묻어있는 시 한 편 남기고 충청도쯤 갔다가

당신이 그래도 그리워지면 돌아올게요.

늘 떠날 준비를 하고 있으면, 문득 혁명처럼 다가오는

그런 행운이 있을 것 같아 급히 몇 자 적습니다.

기다렸어요. 당신의 안부와 늘 건재하다는 가을 소식을,

시가 잡히지 않아요. 요술처럼 시를 쓰는 술꾼들 곁에서

시의 거짓말을 보며 슬픔이 밀려왔어요.

낭만의 그늘에 누워 세상을 버리는 연습을 하며,

한 여자의 껍질만 사랑하며 내일을 붙잡으니, 세상사람 다 됐지요.

오늘부터는 당신의 새로운 낙서를 사랑할까 합니다.

당신의 진실과 의미를 접어두고,

지겨운 껍질과 형식, 그리고 허영까지 사랑하여

글자를 거꾸로 쓰는 그대의 버릇과 같은 가을 나들이

내가 사랑한 가을 코스모스는 십 년도 더 전에 바람이 되어

허무를 다스리는 꿈으로 피어나고 있지요

사랑하고 너무 오래 머문다는 건 모래성을 쌓는 거 같아

바람에게 물어봤어요.

올 가을은 꿈을 꿔도 될까요.

 

 

♧ 술집 <풀>의 여자

 

집 앞 길가의 작은 카페 <풀>은

사말오초(四末五初)의 혼자된 여자들 모여

칙칙한 외로움 말리고, 때로는 그녀들과

오빠 동생하는 동네 백수들 시간을 죽이며

병맥주 세병은 먹고 가는 장사는 안 되지만

정겹고 쓸쓸한 주점.

 

나 또한 그들과 벗이 되어

쓸쓸하고 외로웠으며 때론 위안을 받았지.

말로는 몸과 마음 다 주겠다는

맘 좋은 카페 <풀>의 주인 숙희는

여학교 때, 깡순이, 여자 깡패라 소문난 여자.

지금은 외로운 사내의 진한 농담 받는 주모,

나에게는 사랑을 줄듯 따뜻하게 다가오는 여자,

나라면 언제든지 받아주겠다는

무조건의 사랑 약속 때문에 더욱

외로움만 확인하게 하는 그녀는

오늘도 유혹처럼 하얗게 웃는다.

 

아, 내 이사 와 삼년이 지났고,

인사도 나누며 조용할 땐 외로움 통째로 맡겨

거침없이 농담도 나누며 다짐도 해본다.

당신과 난 친구냐 연인이냐 하며 오늘도

맘대로 정들지 못하고 들풀처럼 흔들리는데,

언제나 줄듯하다 도로 집어넣어버리는

마음들을 확인하며 그녀의

열리지 않는 마음의 문을 두드린다.  

 

 

♧ 지중해(地中海)

 

이발소 그림 같아도

너무 정겨워 버릴 수 없는 시,

당신을 미치게 사로잡는 시,

당신을 향한 내 사랑, 내 마음 같은

그런 따뜻한 시를 써

당신에게 드리고 싶었어요.

 

당신에게 술을 따르는

여기는 친구들 모여 술을 마시니

그냥 아름다운 바다가 된 술의 바다.

밤마다 신시(神市)가 서는 술집 지중해(地中海).

바다를 옮겨 놓고 술을 파는 주모는

곱진 않아도 정말 따뜻한 여자,

늘 온갖 그리움 모아 낭만을 노래하는 그대는

선술집 <지중해>의 음유시인.

 

무진장 술을 마셔도

친구 잡혀 튀지 않아도 될 정겨운 술집,

마셨다 하면, 이백처럼 3백 잔은 마시고,

무릉도원 가는 길에 잠시

동북으로 동남2차 아파트

서북으로 세기2차 아파트

남남으로 신천지 아파트 땅 가르고, 물 갈라,

3대륙을 뚫고 흐르는 물길 따라

갈매기 떼 지어 와 하얗게 낙서하고 떠나는

빌딩 숲 비양도(飛洋島), 비양*에서 만난 술꾼이여.

서글픈 광대 시인이여.

 

바람으로 왔다 간다네. 우린,

절 고비 넘다 바다 용궁 무우남[珊瑚樹] 윗가지에 걸려

기다려도 오지 않는 용왕의 셋째 딸을 기다리는

제주 숫붕이들이여, 욕 안타는 정이어신 정수남이여,

온몸으로 반성하는 술의 바다여,

아, 지중해의 블루스여.

<신시 지중해>여, 낭만의 바다여.

 

---

* 비양도 : 우도에 있는 또 다른 비양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