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향기

김병심 시집 ‘신, 탐라순력도’와 담쟁이

김창집 2013. 11. 22. 00:47

 

♧ 김병심

 

제주 출생.

1977년 ‘자유문학’으로 등단.

시집 : ‘더 이상 처녀는 없다’,

‘울내에게’, ‘바람곶, 고향’,

현재, 한라산 문학 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돌아다니단 보난

흰 벽에 설문대할망이 그려 놓은 담쟁이가 션

여기 같이 옮겨본다. 

 

 

♧ 검은 여자 - 김병심

    -마라도 할망당

 

울다 지쳐 돌이 된 여자, 애기업개를 붙잡고

입을 다문 한 시절, 갈증의 나날

 

살결 짜디짠 마라도, 무색천의 관 속에

바다는 뿌리내려 검은 여자를 낳았지

 

숨 탄 천년의 숲, 꽃으로 피지 못한 금단의 땅

죽어서 나이 먹는 소녀에게 간절히 붙잡히고 싶던 곳, 어머니의 곁  

 

 

♧ 미여지벵뒤

 

한 생 접어 나비가 되신다니

하얀 안개 낀 오작교에서 당신에게 하기 싫은 말

나비와 복사꽃으로 웃던 안녕이라는 말

가루로 날아올라 사라지는 당신이 남긴 말

이별 이별

얻어 쓴 이 생도 내게서 사라질 숨말

사랑 사랑

 

 

♧ 나쁜 피

    - 이중섭 초가

 

  미루나무 카페 옆 정낭을 훌쩍 뛰어넘어 전생으로 들어가니 정지 솥단지 지나 쳇방 외방 식구들 쿨럭였지 눈빛만 빛나던 아이들 쥐 오줌처럼 누런 벽때가 탔다 그림은 아니 그리시고 댓돌에 쭈그려 애꿎은 담배만 죽이던 그 남자, 손목에 곱때 같은 줄이

 

  외할머니 밭은 기침소리 외따로이 나앉은 집 그 때 나는 집을 나왔던가 외할머니 골 깊은 주름 피해 쳇방 바람에 몸을 맡겼던가 허랑한 바람에 이끌려 이승의 길을 헤매었던가 능소화는 왜 저리도 곱게 그은 손목마다 피어나는지 외할머니 입에는 꿉꿉한 담배 연기 같은 한숨만이

 

  그 사람 떠난 댓돌 쭈그려 앉아 부르는 이 노래

  모두들 아픈 시절 신열이라 해두자

  외할머니 황소 고삐 바삐 끌안고 편편하게 돌아가시라

  정낭 너머 하얀 해무海霧 그득하게 몰려드는 오후 

 

 

♧ 인어의 눈물 1

   - 성게

 

제주에서 ‘성게’를 ‘귀살’이라 부른다

‘귀살쩍다’인지 ‘귀신의 살’처럼 소름 돋는다는 말인지

 

해녀들이 무질하는 곳은 저승이다

세상의 귀를 막고 오로지 자신만 믿어야 바다에 뛰어들 수 있다고

온몸에 가시가 무성히 돋아나야 목숨도 날마다 내던질 수 있다고

태풍도 눈보라도 이기고 발라내어 제 자식 먹여 살리는

해녀의 망사리 속 귀신의 살들도 꼼짝없이 수그리는

바다는 저승이다

 

자식 위해 온몸 가시로 울타리 친 귀살의 진주

슬퍼도 울지 않는 해녀에게 저승이 세상이다  

 

 

♧ 가을 한라산

 

허둥대는 내 뒷덜미를 잡고 귓속 가득 너만 이야기 하는 가을

 

낙엽이 나자빠진 한라산이

다만 붉어져 어쩔 줄 모른다

너와 나를 어쩌지 못하고 숨기는 저 산,

탄로날 변명 혹은 빤한 거짓말

부끄럽지 않게 너와 내가 놀던 산,

저 혼자 속이 타는지 확확 번지는 불안으로

우리를 붙잡으려 활시위가 붉다

 

순리대로, 반듯하게, 정해진 대로

붙잡지 않고 달아나는 우리는

신탁의 영원한 도망자 

 

 

♧ 아이 걱정

 

자파리 민 안 뒌다이

놈 다 믿지 말곡,

이녁 밥그릇은 이녁이 졍 다니는 거여

놈의 집의 동녕바치처록

돈 꾸레 뎅기지 말곡

밥 얻어먹젱 축산이처록

이리 기웃 저리 화륵

놈 좋은 싀상 다 간다이

놈의 집의 강 사름 구지 말곡

이녁 식 글 리쳐사 산다이

조상이 눈물 나민 그 집안은

끗난 거여, 알암시냐 

 

 

♧ 금능으로 돌아와줘

 

파도의 뱃속을 차며 솜털 같은 고동이 피었어

 

너울로 춤추던 밀물을 무릎 꿇고 엎어주던 너

 

돌아오기 위해 남긴 금빛 등고선들

등 뒤에 남긴 눈빛이 오래 젖지 않게 꽃게 발로 모래 모종을 심으러 오겠지

 

발자국 위로 숲이 자라는 맨살에서

말할 수 없지만

잠시만이라도

쪽잠처럼 

 

 

♧ 시청 앞 어머니 빵집

 

태풍이 불어도 어머니 빵집은 슈크림이 달콤해요

빗방울 연주를 들으며 들어선 곳

커피 속 형체 없이 진한 향수만 한 모금 삼키는 나,

창밖엔 빗방울만큼 사람들이 뛰어가고

뛰는 가슴만 내 것인 너는, 웃을까봐, 안부문자만

나인 듯 보내본다

그곳에도 똑같이 태풍은 불겠다고

태풍이 불면 술이 마시고 싶어, 나를 거절하지 않던 너

비를 피해 슈크림은 달콤달콤 커피번이 고소고소

케이크들의 잦은 레이스가 간지러워 질투질투

이 수군거림을 너에게 들려주고 싶지만

태풍 부는 날, 보다 웃겼을 나를, 보고 더 웃을까봐

우산 속 아무도 관심 없는 소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