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심 시집 ‘신, 탐라순력도’와 담쟁이
♧ 김병심
제주 출생.
1977년 ‘자유문학’으로 등단.
시집 : ‘더 이상 처녀는 없다’,
‘울내에게’, ‘바람곶, 고향’,
현재, 한라산 문학 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돌아다니단 보난
흰 벽에 설문대할망이 그려 놓은 담쟁이가 션
여기 같이 옮겨본다.
♧ 검은 여자 - 김병심
-마라도 할망당
울다 지쳐 돌이 된 여자, 애기업개를 붙잡고
입을 다문 한 시절, 갈증의 나날
살결 짜디짠 마라도, 무색천의 관 속에
바다는 뿌리내려 검은 여자를 낳았지
숨 탄 천년의 숲, 꽃으로 피지 못한 금단의 땅
죽어서 나이 먹는 소녀에게 간절히 붙잡히고 싶던 곳, 어머니의 곁
♧ 미여지벵뒤
한 생 접어 나비가 되신다니
하얀 안개 낀 오작교에서 당신에게 하기 싫은 말
나비와 복사꽃으로 웃던 안녕이라는 말
가루로 날아올라 사라지는 당신이 남긴 말
이별 이별
얻어 쓴 이 생도 내게서 사라질 숨말
사랑 사랑
♧ 나쁜 피
- 이중섭 초가
미루나무 카페 옆 정낭을 훌쩍 뛰어넘어 전생으로 들어가니 정지 솥단지 지나 쳇방 외방 식구들 쿨럭였지 눈빛만 빛나던 아이들 쥐 오줌처럼 누런 벽때가 탔다 그림은 아니 그리시고 댓돌에 쭈그려 애꿎은 담배만 죽이던 그 남자, 손목에 곱때 같은 줄이
외할머니 밭은 기침소리 외따로이 나앉은 집 그 때 나는 집을 나왔던가 외할머니 골 깊은 주름 피해 쳇방 바람에 몸을 맡겼던가 허랑한 바람에 이끌려 이승의 길을 헤매었던가 능소화는 왜 저리도 곱게 그은 손목마다 피어나는지 외할머니 입에는 꿉꿉한 담배 연기 같은 한숨만이
그 사람 떠난 댓돌 쭈그려 앉아 부르는 이 노래
모두들 아픈 시절 신열이라 해두자
외할머니 황소 고삐 바삐 끌안고 편편하게 돌아가시라
정낭 너머 하얀 해무海霧 그득하게 몰려드는 오후
♧ 인어의 눈물 1
- 성게
제주에서 ‘성게’를 ‘귀살’이라 부른다
‘귀살쩍다’인지 ‘귀신의 살’처럼 소름 돋는다는 말인지
해녀들이 무질하는 곳은 저승이다
세상의 귀를 막고 오로지 자신만 믿어야 바다에 뛰어들 수 있다고
온몸에 가시가 무성히 돋아나야 목숨도 날마다 내던질 수 있다고
태풍도 눈보라도 이기고 발라내어 제 자식 먹여 살리는
해녀의 망사리 속 귀신의 살들도 꼼짝없이 수그리는
바다는 저승이다
자식 위해 온몸 가시로 울타리 친 귀살의 진주
슬퍼도 울지 않는 해녀에게 저승이 세상이다
♧ 가을 한라산
허둥대는 내 뒷덜미를 잡고 귓속 가득 너만 이야기 하는 가을
낙엽이 나자빠진 한라산이
다만 붉어져 어쩔 줄 모른다
너와 나를 어쩌지 못하고 숨기는 저 산,
탄로날 변명 혹은 빤한 거짓말
부끄럽지 않게 너와 내가 놀던 산,
저 혼자 속이 타는지 확확 번지는 불안으로
우리를 붙잡으려 활시위가 붉다
순리대로, 반듯하게, 정해진 대로
붙잡지 않고 달아나는 우리는
신탁의 영원한 도망자
♧ 아이 걱정
자파리 민 안 뒌다이
놈 다 믿지 말곡,
이녁 밥그릇은 이녁이 졍 다니는 거여
놈의 집의 동녕바치처록
돈 꾸레 뎅기지 말곡
밥 얻어먹젱 축산이처록
이리 기웃 저리 화륵당
놈 좋은 싀상 다 간다이
경난
놈의 집의 강 사름 구지 말곡
이녁 식 글 리쳐사 산다이
조상이 눈물 나민 그 집안은
끗난 거여, 알암시냐
♧ 금능으로 돌아와줘
파도의 뱃속을 차며 솜털 같은 고동이 피었어
너울로 춤추던 밀물을 무릎 꿇고 엎어주던 너
돌아오기 위해 남긴 금빛 등고선들
등 뒤에 남긴 눈빛이 오래 젖지 않게 꽃게 발로 모래 모종을 심으러 오겠지
발자국 위로 숲이 자라는 맨살에서
말할 수 없지만
잠시만이라도
쪽잠처럼
♧ 시청 앞 어머니 빵집
태풍이 불어도 어머니 빵집은 슈크림이 달콤해요
빗방울 연주를 들으며 들어선 곳
커피 속 형체 없이 진한 향수만 한 모금 삼키는 나,
창밖엔 빗방울만큼 사람들이 뛰어가고
뛰는 가슴만 내 것인 너는, 웃을까봐, 안부문자만
나인 듯 보내본다
그곳에도 똑같이 태풍은 불겠다고
태풍이 불면 술이 마시고 싶어, 나를 거절하지 않던 너
비를 피해 슈크림은 달콤달콤 커피번이 고소고소
케이크들의 잦은 레이스가 간지러워 질투질투
이 수군거림을 너에게 들려주고 싶지만
태풍 부는 날, 보다 웃겼을 나를, 보고 더 웃을까봐
우산 속 아무도 관심 없는 소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