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피운 바람의 독백
오랜만에
도서출판 전망에서 발간한
권경업 시집
‘꽃을 피운 바람의 독백’을 펼친다.
그 중 술을 소재로
맛깔나게 쓴 시들을 골라
지난 토요일 각시바위에 다녀오다가 찍은
겨울딸기와 같이 올린다.
♧ 취중진담
누군가의 영혼 붉게 물들이고
뜨겁게 적시려면, 아까운 인생
쪼그라들고 썩어버리기 전에 아낌없이
짓이기고 까뭉개야 한다
알알이 으깨지지 않고 빚어진 포도주는 없다
한 번도 가본일 없는 부르고뉴의 햇빛 따가운
로마네꽁띠 장원(莊園)의 지하실 어둠이
포도주를 숙성시켰듯이
시는 어둠 속에서 숙성시킨 시인의 으깨진 삶이다
너의 시에 내가 취하는 이유다
♧ 매실주
하필이면
향기 분분한 꽃이었을 때가 아니고
왜, 똥배 불은 지금이냐고 묻고 싶겠지만
살다보면 세상이란 것
나이 살 통통하게 아랫배에 붙은 것이
꽃보다, 꽃띠보다 더 땡기는 법이지
그렇다고 술에 취한 너를
통째로 먹자는 것 더욱 아니지
하기야 날것을 좋아하는 일 본 놈들 입 비리면
쪼그라진 너를 붉게 물들여
우매보시란 이름으로, 조금씩
조금씩 떼어서 입맛을 다진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그런 변태들과는 다르지
너 말대로 꽃이었던 시절
꽃샘잎샘 모질게 이겨낸 그 세월을
주거니 받거니 우려먹으려는 것이지
그게 약이거든
생각해봐, 얼마나 시(詩)적이었으면
간을 본 사람들, 말끝마다
아이구! 시다, 시다, 그러겠어!
한 때는 다들 꽃이었지
꽃보다 꽃띠보다
더 어린 꽃씨를 품고 있는 매실
♧ 불륜을 꿈꾸는 테이블 위의 와인글라스
내가 내 안에서 출렁이기를
그리하여 흔들리는 내 모습에 너 또한 취하여
쏟아부을 노스탤지어의 선홍빛 뜨거운 영혼, 가슴 가득
채워 흔들리고 싶다. 레드와인
늘, 오채투지의 기도하는 너를 일으켜
저 먼 장원(莊園) 로마네꽁띠를 꿈꾸며
순백의 테이블 보 위에서
장미보다 더 붉게 피울, 긴 밤을
출렁이다가 흔들리다가 함께 쓰러지고 싶다
♧ 너를 마시고 싶다
몽롱한 비취빛, 매끄러운
네 살결을 탐해서가 아니다
긴 목으로부터 흘러내린, 부드러운
가슴 선(線)의 아름다움에 혹해서도 아니다
기울여도 평정을 유지하고
출렁이다가도 갈앉는
맑디맑은 네 영혼에 흠뻑 취하여
탁한 나를 쓰러뜨려야한다
내 작은 잔에, 오늘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쏟아 부은, 너
빈 가슴에 머리 기대어
먼 취밭목 솔바람 소리 듣고 싶다, 소주
참진(眞) 풀꽃이슬(露) 같은
♧ 소주
길지 않은, 단 한 번의 입맞춤으로
네 맑은 영혼 쓰디쓰게
내 빈 가슴에 쏟아 붓고
괴롭다며 발버둥 치다가도
이내 그립다며, 다시
네 차가운 입술 목말라 찾는,
나는 너에게 중독되었다
♧ 오! 가련한 나의 청춘아
자작숲 푸른 손짓처럼 애타게 불러도
일 없다, 돌아서서
먹장구름 매지구름 천둥번개
억수비 쏟아지던 그 여름 쑥밭재 길을
휘여휘여, 쉼 없이 넘어간 나의 청춘아
꽃 피고 새 우짖는 봄날은
쉬 간다하여 붙잡을 수 없었고
애처롭게, 누렇게 타들어 가는
갈참나무 마른 손짓으로 너를 부른다
한 번도 사랑한다 불러보지 못한
가여운 나의 청춘아
그 흔한 그리움 한번 갖지 못하고
그 많은 기다림 하나 두지 못하고
고갯마루 내려다보이는
백로 추분 한로 상강 그리고 입동이
발 동동 구르며 기다리고 있는 것을
더 무엇 주저하겠느냐
어느새 골 깊은 주름 이마에 드리운,
랑도 이별도 뜬구름 같았던 나의 청춘아
돗자리 둘둘 말아 옆에 끼고
지리산 국화주 큰 병으로 준비하여
단풍든 개울물 붉게 흘러가는 유평계곡
내 노래에 내가 춤추고 내가 나에게 술잔 권하여
여린 볕, 가을 한나절이라도 취했다 오자
오! 나의 가련한 청춘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