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향기

꽃을 피운 바람의 독백

김창집 2013. 12. 17. 07:06

 

오랜만에

도서출판 전망에서 발간한

권경업 시집

‘꽃을 피운 바람의 독백’을 펼친다.

 

그 중 술을 소재로

맛깔나게 쓴 시들을 골라

지난 토요일 각시바위에 다녀오다가 찍은

겨울딸기와 같이 올린다. 

 

 

♧ 취중진담

 

누군가의 영혼 붉게 물들이고

뜨겁게 적시려면, 아까운 인생

쪼그라들고 썩어버리기 전에 아낌없이

짓이기고 까뭉개야 한다

 

알알이 으깨지지 않고 빚어진 포도주는 없다

 

한 번도 가본일 없는 부르고뉴의 햇빛 따가운

로마네꽁띠 장원(莊園)의 지하실 어둠이

포도주를 숙성시켰듯이

시는 어둠 속에서 숙성시킨 시인의 으깨진 삶이다

 

너의 시에 내가 취하는 이유다

  

 

♧ 매실주

 

하필이면

향기 분분한 꽃이었을 때가 아니고

왜, 똥배 불은 지금이냐고 묻고 싶겠지만

살다보면 세상이란 것

나이 살 통통하게 아랫배에 붙은 것이

꽃보다, 꽃띠보다 더 땡기는 법이지

그렇다고 술에 취한 너를

통째로 먹자는 것 더욱 아니지

하기야 날것을 좋아하는 일 본 놈들 입 비리면

쪼그라진 너를 붉게 물들여

우매보시란 이름으로, 조금씩

조금씩 떼어서 입맛을 다진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그런 변태들과는 다르지

너 말대로 꽃이었던 시절

꽃샘잎샘 모질게 이겨낸 그 세월을

주거니 받거니 우려먹으려는 것이지

그게 약이거든

생각해봐, 얼마나 시(詩)적이었으면

간을 본 사람들, 말끝마다

아이구! 시다, 시다, 그러겠어!

 

한 때는 다들 꽃이었지

꽃보다 꽃띠보다

더 어린 꽃씨를 품고 있는 매실

  

 

♧ 불륜을 꿈꾸는 테이블 위의 와인글라스

 

내가 내 안에서 출렁이기를

그리하여 흔들리는 내 모습에 너 또한 취하여

쏟아부을 노스탤지어의 선홍빛 뜨거운 영혼, 가슴 가득

채워 흔들리고 싶다. 레드와인

늘, 오채투지의 기도하는 너를 일으켜

저 먼 장원(莊園) 로마네꽁띠를 꿈꾸며

순백의 테이블 보 위에서

장미보다 더 붉게 피울, 긴 밤을

출렁이다가 흔들리다가 함께 쓰러지고 싶다

  

 

♧ 너를 마시고 싶다

 

몽롱한 비취빛, 매끄러운

네 살결을 탐해서가 아니다

긴 목으로부터 흘러내린, 부드러운

가슴 선(線)의 아름다움에 혹해서도 아니다

기울여도 평정을 유지하고

출렁이다가도 갈앉는

맑디맑은 네 영혼에 흠뻑 취하여

탁한 나를 쓰러뜨려야한다

내 작은 잔에, 오늘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쏟아 부은, 너

빈 가슴에 머리 기대어

먼 취밭목 솔바람 소리 듣고 싶다, 소주

참진(眞) 풀꽃이슬(露) 같은 

 

 

♧ 소주

 

길지 않은, 단 한 번의 입맞춤으로

네 맑은 영혼 쓰디쓰게

내 빈 가슴에 쏟아 붓고

괴롭다며 발버둥 치다가도

이내 그립다며, 다시

네 차가운 입술 목말라 찾는,

 

나는 너에게 중독되었다   

 

 

♧ 오! 가련한 나의 청춘아

 

자작숲 푸른 손짓처럼 애타게 불러도

일 없다, 돌아서서

먹장구름 매지구름 천둥번개

억수비 쏟아지던 그 여름 쑥밭재 길을

휘여휘여, 쉼 없이 넘어간 나의 청춘아

꽃 피고 새 우짖는 봄날은

쉬 간다하여 붙잡을 수 없었고

애처롭게, 누렇게 타들어 가는

갈참나무 마른 손짓으로 너를 부른다

한 번도 사랑한다 불러보지 못한

가여운 나의 청춘아

그 흔한 그리움 한번 갖지 못하고

그 많은 기다림 하나 두지 못하고

고갯마루 내려다보이는

백로 추분 한로 상강 그리고 입동이

발 동동 구르며 기다리고 있는 것을

 

더 무엇 주저하겠느냐

어느새 골 깊은 주름 이마에 드리운,

랑도 이별도 뜬구름 같았던 나의 청춘아

돗자리 둘둘 말아 옆에 끼고

지리산 국화주 큰 병으로 준비하여

단풍든 개울물 붉게 흘러가는 유평계곡

내 노래에 내가 춤추고 내가 나에게 술잔 권하여

여린 볕, 가을 한나절이라도 취했다 오자

오! 나의 가련한 청춘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