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여는 작가의 시
한국작가회의에서
내일을 여는 ‘작가’
2013 하반기호가 나왔다.
기획 글은
1 문학의 미래
2. 새로운 ‘삶-지식’
공동체와 유리의 미래
좌담 : 서정시인이 절필하는 시대,
민주주의를 생각한다
내용 중에서
시 몇 편을 골라
백량금과 같이 싣는다.
♧ 오래된 탁자 - 석지연
죽어가는 짐승처럼 당신은 고개를 떨군다
이별이라는 메카에 부유하고 있는 저 여자 때문이 아니지 않은가
당신 없는 나는 먼지바람이 들이켜는 사막의 신전
일평생 서로 마주 서 있기만 한 기둥사이로 부는 바람 참고 있다
기도하는 자의 두 무릎을 만나기 위해
여자의 눈물 젖은 휴지 조각 쌓이듯 지붕 위 새떼의 배설 견디고 있다
내 안쪽에 갇힌 저 지평선의 태양
몸 밖 멀리서 이제 그만 사라져 사라져 메아리 같은 소리 들릴 때
내 등뼈를 걷어차는 발끝에는 당신의 울음이 다 번져 있다
당신은 한 번의 걸레질로 모든 기억을 거뒀다 생각하지만
나는 실려 가는 것에 없다
뼛속 깊이 갈라진 자국에 있다 끝끝내 분질러짐에 있다
온몸에 곰팡이 피도록 눈물을 받아먹을 것이다
사지가 찢긴 늑대처럼 우리는 썩어간다
♧ 불구 - 박남희
불구가 나를 호명하고 있다 나의 온전하지 못함은 뜨거움에서 비롯된 것, 물이 끓을 때 안절부절 바닥이 요동치듯 내 생각은 뜨거울 때 다리를 전다 절뚝이며 어디론가 걸어가는 내 생각을 따라가다 보면 이름을 알 수 없는 호수에 이를 때가 많다 종종 커다란 거울이었다가 때로는 오묘한 악기가 되는 호수는 불구가 호명해낸 판도라의 이름이다
호수는 특히 바람이 심한 날 더 크게 다리를 전다 불구에게 제 몸이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들켜버린 것이다 호수는 제 주변에 너무 많은 길을 품고 있어서 아프다 밤새 길을 따라 흘러들어온 소리들은 호수의 신음이다 온전히 고여있지 못하고 흘러가야만 한다는 것, 제 안에 너무 많은 주소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수시로 통증을 유발한다
불구는 뜨거운 분화구이다 나의 부족함과 너의 부족함을 분화구 속에 넣고 끓어 넘치게 해 부족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 그런 불구가 나를 시 쓰게 한다 나는 절뚝이며 생각하고 현기증을 앓으며 사물을 보다가 불현 듯 나를 버릴 수 없음에 절망한다 그동안 제 몸이 불구인 줄도 모르고 철없이 끓어 넘치던 말의 청춘을 생각한다 그러다 마지막 남은 온전한 불구, 너를 생각한다 내 몸을 끝끝내 떠날 수 없는 너,
나는 절뚝절뚝, 오늘도 너를 쓴다
♧ 콩꽃 - 이상인
광주 망월동 무덤가에
혼자 피어있는 노란 콩꽃을
두 손 모아 감싸고 오다가
옛 도청 앞에서 살며시 펼치자
노오란 나비 한 마리
멈칫하더니
팔랑팔랑 아픈 기억을 폈다, 접었다
훨훨 날아간다.
어둡고 찬 땅속에 오래 갇혀있던
그 맑디맑은 이름 하나
이제 막 푸른 하늘 속으로
손뼉 치듯 날아갔다.
♧ 백사마을 - 이영혜
늙은 오동나무 꽃그늘 아래서
낮술 불콰한 두 노인이
장기를 두고 있다
무르지 마라
무르지 마라
한평생 물러버린 날들
한 수도 되돌릴 수 없다
더 이상 불끈 세울 일도 없는
꽃잎들이 똑, 똑
훈수를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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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사마을 : 중계동 104번지에 있는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
♧ 그리운 마적(馬賊) - 정윤천
마적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작가대회에서 돌아오는 하루나절의 관광버스 안에서는 심심한 주전부리와 함께 거품 머금은 깡통들만 자꾸 출몰했다. 코를 골거나 휴게소마다 내려서 오줌을 쌌다.아무도 피를 흘리지 않았다.어깨 한 쪽이 왕창 으스러져 비명을 질러주었거나 무릎 아래가 떨어져나가 한 쪽 발로 버티는 이도 보이지 않았다. 머리채를 잡혀 입술이 파랗게 질린 여자 하나 태어나지 않았고, 그 여자를 위해 죽기로 작정하고 달려들었다가 옆구리에 도끼날을 받은 사내도 없었다. 저마다의 속곳들에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새마을 노래의 가사처럼이나일정은 무사했다. 모가지에 걸었던 이름표를 착실하게 반납하고 나자 작가도 서둘러서 내 몸을 떠났던가.그리운 마적, 지루했고마려운 귀로 끝에서 손을 흔들고 헤어지면서, 서로에게 애썼다며 고생했다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 비스킷을 굽다 - 최호빈
줄에 매달린 거미가 움직이지 않는다
몸속에 지은 집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의자에 누워 고개를 젖히면
두 눈썹 사이에 걸어놓은 방울이
암호처럼
길고
길게 흔들린다
안면 없는 사람들과의 공동생활
비스킷을 구우며
생활이 생활을 모방하고 있다
맑은 하늘과 흐린 하늘이 뒤엉켜 있는
일교차가 심한 날
입 안에 가득한 창을 닦는다
거짓말이 몰려온다
거짓말이 자욱하다
바람이 귀를 힘껏 물고 지나간다
작은 남자와
작은 여자를 매달고 있는 줄을 바라보며
식은 차가 담긴 찻잔의 거미줄을 마신다
건조한 실내가
시들지 않는 꽃잎을 붉게 물들인다
두 눈썹 사이에 걸어놓은 방울을 흔들며
비스킷이 구워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