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순진 시집 ‘자작나무 카페’
양순진 시인이 시집
‘자작나무 카페’를 보내왔다.
시인은 제주 신도1리에서 출생하여
제주대 국문학과 졸업하고
2009년 ‘시인정신’으로 등단했으며
한라산시문학, 시인정신문학회 회원이다.
시집은
1부 빗소리의 암호
2부 무드셀라증후군
3부 능소화 핀 집
4부 나무 그늘에 깃들다
5부 멎는다는 것
으로 짜여졌다.
해설은 문학평론가 정신재 교수가 쓰고
도서출판 오감도에서 발행했다.
시 다섯 편을 골라
지금 한창 제주 겨울을 달구고 있는
피라칸타 열매와 함께 올린다.
♧ 홍어
죽어서도 웃겠습니다
7kg 밖에 안 되는 무게의 납작한 몸
보름달 뜰 때까지 삭혀 고스란히
저녁처럼 저물겠습니다
살아서 당신의 포구에서 행복했습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심해
날렵하게 가르던 물살이
이제 조용합니다
나의 허무가 때로
독한 향기로 당신 몸 속 전파된다면
나로 인해 푸르던 섬
영산포 달빛 끌어당기세요
밀물과 썰물 줄다리기에 둥글어진 검은 돌
영혼에 젖어드세요
죽어서도 웃겠습니다
살아서 누린 해풍과 별빛 고스란히 내 몸에
새기겠습니다
죽어서도 썩어서도 당신의 포구는
영원한 나의 밀항지
염부의 절대 가업처럼
푸른 바다는 생의 염전입니다
그 염전에 스며들어 삭힌 해풍
달빛 타고 노래하듯이
죽어서도 살겠습니다
♧ 마라도 숨비기꽃
말의 씨가 수 천 수 만 물살임을
마라도 그 끝에서 보았습니다
태양 기우는 동안
아무리 검은 바위 굳게 입 다물고
가슴
새까맣게 타버려도
바위를 치고 사라진 물살은 더 이상
섬 위로 떠오르지 않습니다
주인 사는 집보다 공소 더 많은 마라도엔
숨비기꽃 말없이 피고 집니다
수 천 수 만 물살에 입은 얼고 귀는 멀어
가슴은 온통 푸른 멍투성이
그 멍씨 섬에 뿌리내렸습니다
말의 씨는 귀로 막고
귀의 독은 가슴으로 잠재운 시간
주인이 길들인 말보다 주인 없는 말이
더 날뛰는 건 고삐가 그립다는 것
말은 하늘보다 높다고
말은 바다보다 깊다고
말은 소금기 먹은 섬보다 따뜻하다고
마라도 그 끝에서
보았습니다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온 숨비소리
마라도 숨비기꽃
다시, 生입니다
♧ 자작나무 카페
한참 오래 전
정실길 걷다가 긴 나무 기둥 심어진
집한 채 보았네
안은 볼 수 없었지만 나무줄기에 잎이 돋고
자작나무 카페라는 간판 올려졌을 때
또 한 번 스쳐 지나갔네
그대와 함께였네
그대와 나 아직 서먹서먹해서
그 문 열고 들어가지 못했네
카페 문 여는 것보다 그대 맘 여는 게
먼저였기에 마음 깊이 숨겨두었네
그대 안 궁금한 것처럼
카페 안 궁금했지만
다음 生에 라고 약속했네
가을 가고 겨울이 올 즈음에 그가 떠났네
그의 마음 열어보기도 전에
카페 안 들어서지도 못한 채
자작나무 사랑은
설원에 묻혀버렸네
다시, 정실길 걷게 되었네
봄꽃들 피어나 서성였지만 난 혼자였네
자작나무 잎은 무성할 대로 무성하고
카페 문 밖 빈 의자들 날 보고 있었네
안은 커튼에 가려져 볼 수 없었네
들어갈까 하다가 그냥 스쳐지나갔네
그대 안 들어서도 못한 채 보내버린
그 한 生 못내 아쉬운 것처럼
자작나무 카페를 지나치네
혼자 그 앞을 스치네
그가 자작나무로 서 있네
아직도 그대 안 열어보지 못했네
♧ 물꽃
마음의 문 열 때는
막을 수 없는 물처럼 차고 넘쳐
당신에게 닿기 위해
아래로만 흐르면 되었는데
돌아가려 둥 돌렸을 때
물이랑마다 심어 놓은
물꽃 피고 있었네
흐르는 것도
거슬러 오르는 것도
당신에게 향하는 것임을
물은 아네
♧ 부처 오셨다
부처님 오신 날,
극락사에서 연등 켜고 백팔 번 절하니
절밥 준다
나물에 고추장 얹고
내 안에 응어리진 업
고인 눈물마저 비벼 꿀꺽 삼켰다
연 목 꺾이듯 울컥 핏물이 번진다
몇 겁의 죄가 엉켰다 쏟아지는지
몇 겁의 인연이 엉켰다 풀리는지
온통 진흙탕이던 내 안 연꽃이 고개 내민다
죄도 사랑도 짓이겨 버무리고
업보인 양 삼켜내면 꽃으로 환생하는구나
빛나는 경전이 되는구나
마침내는 극락으로 이르는구나
돌아오는 길, 등꽃 환하고
깃털처럼 가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