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작가 16호의 시
♧ 각방 - 권혁소
안방 윗방 도장방 상방
내가 아는 방들의 이름인데
5년 만에 살림을 합치고 보니
각각 자는 게 편하다
어머니 살아생전
부부싸움 끝에도 각방을 쓰면 아니 된다 하셨거늘
어느덧 각방이 편한 나이
몸은 편한데 마음은 서늘하다
♧ 제비꽃 - 황영순
씻는 것도 잊어버리고
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세상으로 향하는 모든 길들도
애써 지워버리고 황망히
돌아눕고 싶은 봄날
욱신거리는 잔등을 타고
보랏빛 속살을 드러낸 키 작은 풀꽃이
겨울을 밀치고 들어와
꼭 요만큼만 피었다 지고 싶다고
꼭 요만큼만 피었다 지고 싶으시다고
목 놓는다
봄으로도 가지 못하고
봄으로도 오지 못하는 나는
고단한 잔등 위에 아주 작은 꽃송이 올려
꼭 요만큼만 살다 가고 싶다고
꼭 요만큼만 살다 지고 싶다고
♧ 정오의 양귀비꽃 - 한영숙
홀로 도도한 붉은 입술과
바람을 동강내는 말간 이마
휘어질 듯 긴 허리는 무엇을 벼르기에
먼 하늘 흘러가던 구름을 당길까
햇살 눈부신 유월 대낮에
저절로 발길 가는데
가는 손목 잡고 그만 타협하고 싶어라
사랑이 있다면 이럴까
눈꺼풀이 좀 떨리면 어때
누가 보든 말든
첫사랑의 그 사내가 되어
푸른 대궁에 목숨 걸고 싶은 걸
♧ 한탄강 - 조광태
수십억 년
수난으로 변해왔을
장엄하고 눈부신
기암괴석 앞에서는
세상 살기 어렵다고
근심걱정 짊어진
내 가슴속 어지럼은
티끌보다 못한
가벼움인데도
이 번뇌의 끝
놓질 못하네.
♧ 편서풍 - 정현우
그리운 것들은 언제나 멀리 있다. 편서풍이 불면 금관악기를 불어야 한다. 세상에서 가장 멀리 가는 소리를 내야 한다. 전깃줄 위의 새들의 음표처럼 날아오르고 우리가 함께 저물었던 어느 저녁이 불을 켜는 시간, 우리는 먼길을 돌아온 바람소리에 귀를 귀울여야 한다.
♧ 민중아 민중아 - 정석교
피 같은 진심 공손히 받쳐주고
피 떡 되어 돌아오는
민중아, 민중아
벙어리 같은 민중아
맞으면서도 울지 못하는 민중아
길을 막고 물어봐도
긍정의 말 대신
손사래 치고 저 멀리 멀어지는
그대 또한 민중이 아니더냐
붉은 띠 질끈 동여매고
저 깃발 저 함성 저 촛불
하나하나의 목소리 도 한 것인데
올무는 왜 우리를 향해 있는가
가둘 수 없는 이 땅의 정신
세상에 빈껍데기 채우는 것
민중아, 민중아
메마른 강둑을 푸르게 채우는 것 또한
민중아, 민중아
몇 세월 그렇게 지나다 보면
푸른 담쟁이 넝쿨 되겠지
♧ 꿈에 아버지가 오셨다 - 이상국
꿈에 아버지가 오셨다
중학교 때 못간 수학여행 가라고 돈을 마련해 오셨다
내가 아무리 괜찮다고 해도 갔다 오라고 해서
꿈에 수학여행을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