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카 일기

갑오년 설날 아침에

김창집 2014. 1. 31. 00:16

 

정작 2014년 새해가 밝았지만

설날이 지나지 않으니

새해를 맞은 것 같지가 않았다.

 

그래서

뱀이 슬며시 꼬리를 감추고

상서로운 청마가 등장하는

갑오년 첫날 아침에야

지난 1년 동안 열심히 드나든 분들께

매화로 세배를 드린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설날 아침에 - 김종길

 

매양 추위 속에

해는 가고 또 오는 거지만

 

새해는 그런 대로 따스하게 맞을 일이다.

 

얼음장 밑에서도 고기가 숨쉬고

파릇한 미나리싹이

봄날을 꿈꾸듯

 

새해는 참고

꿈도 좀 가지고 맞을 일이다.

 

오늘 아침

따뜻한 한 잔 술과

한 그릇 국을 앞에 하였거든

 

그것만으로도 푸지고

고마운 것이라 생각하라.

 

세상은

험난하고 각박하다지만

그러나 세상은 살 만한 곳.

 

한 살 나이를 더한 만큼

좀 더 착하고 슬기로울 것을 생각하라.

 

아무리 매운 추위 속에

한 해가 가고

또 올지라도

 

어린것들 잇몸에 돋아나는

고운 이빨을 보듯

 

새해는 그렇게 맞을 일이다.

 

 

♧ 설날(214) - 손정모

 

자오선이 평소에 어디를 지나건

솔바람 소리에 깨어나는 산울림처럼

천체는 동에서 서로 기울기 마련이리라.

졸면서도 되풀이되는 타성의 발자취에

결코 이대로 둘 순 없다며

선조들, 지혜의 칼날 갈았네.

 

정월이 하필이면 겨울인 것은

춘삼월의 환희를 기약함일까?

강가에 드리워진 물안개처럼

내막 알 수 없을지라도

날 잡고 마음 가다듬어 여는

새해의 첫 날이여. 

 

 

♧ 설날 풍경 - (宵火)고은영

 

아버지 정갈한 두루마기 앞섶이

유난히 차 보이고

대님 매던 서툰 손놀림에

여명의 장닭소리 아직 생생한데

 

희망을 두레질하는 차례상에는

언제나 생소한 얼굴들이

낡은 액자에 오랜 고화로 박힌 채

살폿 웃거나 근엄하다

 

쪽진 머리 저 여인은 고조 할매

흑백의 두루마기 아스름 저 시무룩한 고조 할배

구레나룻 여덟 팔자 유난히 쌔근한

저 남자 우리 할매 멋스러운 지아비

서른한 살 과부든 우리 할매

할배 바라보는 눈매가 붉어 애처롭다

 

묵시적 가족사

태어나 얼굴 한번 구경 못했다

피붙이라고 살가운 말 한 마디 없었다

어느 시공에도 우리는 서로 만나지 못했고

만날 수 없던 운명 호적에나 묶여 있을까

 

설날 아침

휘적휘적 저 눈길을 걸어 온 조상 들

우리 집 안방에 진귀한 고화 전시에 나란히 앉아

한껏 밝은 얼굴로 따끈한 떡국을 드시는 중  

 

 

♧ 설날 - 오세영

 

새해 첫날은

빈 노트의 안 표지 같은 것,

쓸 말은 많아도

아까워 소중히 접어 둔

여백이다.

 

가장 순결한 한 음절의 모국어(母國語)를 기다리며

홀로 견디는 그의 고독,

백지는 순수한 까닭에 그 자체로 이미

충만하다.

 

새해 첫날 새벽

창을 열고 밖을 보아라.

 

눈에 덮혀 하이얀 산과 들,

그리고 물상들의 눈부신

고요는

신(神)의 비어 있는 화폭 같지 않은가.

 

아직 채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은

눈길에

문득 모국어로 우짖는

까치 한 마리.  

 

 

♧ 설날 아침에 - 동호 조남명

 

매년 오는 해를

맞이하지만

새 마음으로 맞아야 하리

 

무언가 소망을 안고

첫날을 맞이하라

꼭 이뤄야 할 일

마음에 담고 첫 아침을 맞으라

 

나이 더 늘었으니

그 값을 해야 하고

내 나이 먹는 줄만 알면서

아이들 머리 크는 것 모르면 안 되느니

 

핏줄들 모여 조상 기리고

둘러앉아 떡국 한 그릇

술 한 잔 나눌 수 있음을

기뻐하고 만족해야 할 일이다

그리 못하는 사람도 있지 않은가

 

갑자 넘도록 새해를 맞지만

덧없는 세월은 흐르는 물 같으니

시간을 가볍게 허비하지 말 일이다

이 땅 어디, 누구에도 축복이 있기를

또, 아침 해에 빌어 보노라.